제 나름 ‘안테나’를 세워 탐문해보니, 피고 기업인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가 기금도 내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은 해법에 주무 부처인 외교부도 난색이었다고 합니다. <한겨레>도 외교부는 물론 전직 보수 외교 원로들도 한·일 관계의 민감성과 역사성 등을 고려해 ‘속도 조절’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권유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한 <한겨레>에 따르면 “대통령께서 정말 세게 밀어붙였다”라고 합니다. 일본 자민당 중진 의원이 “일본의 완승이다. 아무것도 양보한 게 없다”라고 평가한 굴욕적인 해법을 윤석열 대통령은 왜 밀어붙였을까요?
지난 대선 때 당시 윤석열 후보의 말을 분석한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국민의힘 텔레비전 토론회 전문을 모아 ‘윤석열 담론’ 지도를 그렸습니다. 제가 쓴 ‘윤석열의 말 분석하니 응징의 리더십 보인다’라는 기사의 한 대목입니다.
■ 낮은 비중의 정책 담론
윤석열 담론 지도에서 정책 관련 의미 덩어리의 상호 관계를 보면, ‘최고(의)→전문가, 경제→전문가, 정책→전문가’로 연결된다. 즉 ‘정책’ 노드와 연관된 윤석열 후보의 생각은 ‘전문가’를 통한 ‘경제 번영’과 ‘해결’이다. “다양한 분야의 정책은 국민들에게, 경험 많은 분들에게, 전문가들에게 제공을 받고 그것들을 잘 조합하고 인사관리를 하고(2021년 9월16일 토론)” “앞으로 제가 집권하면 분야별로 최고 전문가를 뽑아서 실력 있는 정부를 만들고 역동적인 경제를 일궈내겠습니다(2021년 9월23일 토론).”
정치 초년생 윤석열은 후보 시절 전문가를 중용하고 전문가 의견을 듣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통령 윤석열은 이제 ‘나홀로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 행보만 보입니다. 외교 전문가들이 포진한 외교부마저 제삼자 변제를 하더라도 피고 기업이 배상하고, 사과하고, 참여하는 마지노선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최고 통수권자의 드라이브로 마지노선마저 무너졌습니다.
전문가 등용과 전문가 의견 경청 상실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6월 <중앙일보>가 전한 용산 대통령실 국무회의 분위기입니다.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과 관련해 교육부 차관이 수도권 대학 정원 규제 등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하자 윤 대통령이 ‘다시 한번 그런 얘기 하면 교육부를 없애버리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한평생을 검사로 살아온 대통령은 교육이나 외교는 경험하지 못한 분야입니다. ‘금융조세조사부 검사면 금융전문가, 공정거래조사부 검사면 공정거래 전문가, 식품 의료범죄부 검사면 식품 의료 전문가’식의 ‘만사검통’ 인사 문법을 따르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은 외사부 경험이 전무한 특수통 출신입니다.
그런 윤석열 대통령이 외교부 전문가들의 조언도 따르지 않은 채 나홀로 드라이브를 한 뒤에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며 항변합니다. 2021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한·일 김대중·오부치 선언 2.0 시대 실현’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언행을 보면 윤 대통령이 제대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이해하고 있는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3월8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쓴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98년 10월 일본 국회 연설문을 접하고 ‘내 생각과 똑같다’라고 참모들에게 언급했다”라고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1998년 10월 일본 국회 연설이란 바로 이 선언을 한 뒤 당일 오후 일본 의회에서 한 연설입니다. 이 연설문을 이제야 접했다고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후보 시절 내내 주장하고, 이번에도 강변했는데 의회 연설을 미처 읽지 못했다고 자인한 건가요?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식 명칭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입니다(전문 보기). 1998년 10월8일 두 정상은 ‘과거 역사 직시’와 ‘미래 지향’을 담은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제2항).”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 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제2항).”
3·1절 기념사에서도 드러나듯 윤석열 대통령은 과거 역사 직시를 거둬내고 미래 지향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큰 오독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큰 구상의 하나로 이 선언을 견인했습니다.
“양국 정상은 양국이 각각 미국과의 안전보장 체제를 견지하는 동시에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다자간 대화 노력을 더욱 강화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제6항).”
“오부치 총리대신은 확고한 안보 체제를 유지하면서 화해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한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제7항).”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2000년 남북 공동선언과 2002년 북·일 공동선언의 마중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기정 교수(서울대 일본연구소)는 공동선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전사(前史)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가깝지만 먼 한·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돌아보라’). 거인 김대중의 구상은 ‘한·미·일-북·중·러’ 대결 체제의 해체였습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겠다면서, 오히려 ‘한·미·일 블록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시사IN> 유튜브 방송 <정치왜그래?>에 출연해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 갖다가 쓰고 계속 언급하니까 슬퍼요”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혹시 아직도 <시사IN> 유튜브를 구독하지 않으셨다면 구독 꼭 눌러주세요).
춘래불사춘.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심정이라 뉴스레터가 길었습니다. 이 뉴스레터에 인용된 <시사IN> 기사는 옛 기사입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되새길 만한 심층 기사입니다. 매거진은 기록이자,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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