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입니다. 저는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오월이 되면 어느 학교에서든 글짓기 대회나 그림그리기 대회가 열렸어요. 주제는 숫자 세 개, 5·18이었습니다.
5·18에 대한 첫 기억은 어머니의 탄식입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쌀을 씻던 어머니가 “그애 목소리가 참 꾀꼬리 같았는데”라고 중얼거리셨어요. 어떤 예고도 없이 툭 튀어나온, 한숨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창문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오는 맑은 햇빛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탄식이었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5·18 당시 간호대 학생이었던 어머니가 새벽마다 숨죽여 밥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습니다. 불을 켜면 총알이 날아올까 봐 어둠 속에서 새하얀 쌀알을 씻을 때마다 봉고차에 실린 확성기에서 “시민 여러분, 피가 부족합니다. 헌혈을 해주십시오”라고 외치던 여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도요.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은 아침마다 밥을 지어놓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심정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년 전 5·18을 취재하면서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한 공수부대원을 만났습니다. 어느 야산 근처에서 고등학생을 풀어줬는데 다른 학생은 끝내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고막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습니다. 막내 삼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친한 친구의 책상에 하얀 국화가 올려져 있었고, 그걸 본 학생들이 모두 학교를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막내 삼촌은 곧 가족들의 수소문으로 집에 돌려보내졌습니다. 막내 삼촌은 담을 넘고, 잡혀오면 또 넘어서 친구들이 있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어린 막내 삼촌이 총에 맞거나 끌려갈까 봐 걱정됐던 가족들은 결국 그를 집안 창고에 가뒀습니다.
그날 밤 막내 삼촌은 목이 다 쉬어서도 밤새 울부짖으며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렸다고,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어딘가 다친 짐승이 내는 쇳소리 같았다고 어머니는 말합니다. “누나, 누나도 OO이 알잖아, 내 친구 OO이 알잖아, 걔가 죽었단 말이야, 제발 좀 나가게 해줘, 제발.”
혹시 저 공수부대원이 말하는, 끝내 살아남지 못한 고등학생이 막내 삼촌의 친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메모 중이던 손도 멈춰버렸습니다. 41년 전 그 시간, 그 공간에 고여 있던 이야기가 제게 흘러들어온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다시 41년 뒤에 “내 어머니, 내가 취재했던 공수부대원에게 들은 이야기란다”라며 제게 고여 있던 이야기를 물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응어리가 조금 풀렸지만,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자꾸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기자가 되면 꼭 오월만은 제대로 다루고 싶었는데, 기사 한두 개를 쓴 게 전부입니다.
이 긴 편지를 읽으신 독자님만이라도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며 조사를 하고 있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www.518commission.go.kr) 홈페이지를 한번 방문해서 둘러봐주셔도 좋고, 철마다 망언을 내뱉는 정치인들을 매섭게 비판해주셔도 좋습니다. 저도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더욱 고민하겠습니다. 내년 오월에는 그 결과물을 들고 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