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자님~! 무더위와 태풍. 날씨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사진팀 조남진 기자입니다.
뉴스레터에 무슨 이야기를 쓸까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말입니다. “1년은 우려먹고도 남을.” 까고 또 까도 양파 껍질처럼 계속해서 사건이 터져 나올 때 기자들이 흔히 쓰는 말입니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 농단 취재 때도 많이 썼던 말이지요.
청와대가 ‘용와대’로 바뀐 지 15개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그 ‘1년은 우려먹고도 남을’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만, 신기하게도 채 일주일을 못 버티고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독자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그런 뉴스가 거의 매주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일본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 통장잔고 위조로 구속된 대통령 장모, 석연치 않은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안, 오송 지하차도 참사, 대통령 부인의 해외 명품숍 방문, 칼부림 참사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만큼 굵직한 뉴스들도 채 일주일을 못 버팁니다. 이번에는 ‘100년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 중인 세계잼버리 뉴스가 모든 뉴스를 땅속 깊이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세계잼버리 얘기가 나왔으니 추억을 더듬어봐야겠습니다. 충청도 시골 마을, 없는 살림에 6남매의 막내아들에게 스카우트 단복 한 벌을 입혀보는 게 소원이셨던 어머니는 어렵게 쌈짓돈을 모아 저를 스카우트 단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구호 “준비!” 스카우트 단복을 받아오던 날, 어머니의 표정에 ‘뿌듯함’이 넘쳐흘렀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단벌 신사처럼 여름이면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만 했습니다. 모자까지 쓰고 말이지요.
여름방학이 되면 지역 스카우트 단원들이 학교에 모여서 ‘야영’이란 것을 했습니다. 뒷산에 가서 곤충도 잡고, 운동장에서 각종 게임도 하고...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셀마’라는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온 겁니다. 밤새도록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교실로 대피했지만 더 이상의 야영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었어요. 위험하다며 집에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1987년 여름의 일입니다.
충청도 출신인 저는 사실 전라북도와 아주 친근합니다. ‘전파 월경’ 때문이지요. 충청남도 사람들은 대부분 KBS <9시 뉴스> 말미에 나오는 ‘대전·충청권’ 뉴스를 시청합니다. 그런데 제 고향 마을은 이상하게도 그 채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KBS 전주방송총국에서 보내주는 ‘전북권’ 뉴스를 시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전역이 어디인지, 충남도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몰랐어도 전북도청이 어디인지, 덕진공원과 풍남문이 어디에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지요.
‘새만금’이란 단어가 KBS 전북권 뉴스에 등장한 것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입니다. 한번 등장하기 시작한 ‘새만금’은 지금까지도 전북권 뉴스에선 빠져서는 안 될 필수 단어가 되었습니다. 마치 ‘땡전뉴스’처럼 말이죠. 전라북도를 방문하는 모든 대권주자들도 ‘새만금’을 외쳤습니다. 새만금을 성공시키는 것만이 전라북도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것처럼 말해왔지요(사실 이번 새만금 세계잼버리도 그런 취지에서 유치했던 것입니다).
총길이 33.9㎞.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그 새만금 방조제에 지난 2월 말 처음 가봤습니다. 취재 때문에 군산, 김제, 부안의 갯벌은 가봤지만 방조제를 달려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고군산군도가 육지와 연결되었고, 오른쪽이 살아 있는 바다인지 왼쪽이 죽어가는 바다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긴 방조제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고 웅장했습니다. 한참을 달려 변산반도국립공원과 연결돼 있는 새만금방조제의 끝에 도착하니 ‘잼버리공원’이라는 휴게소 비슷한 전망대가 보이더군요. 농지를 만들겠다며 부안 해창갯벌을 매립해 조성한 드넓은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맨바닥이 드러나 있던 그곳이 바로 엉망진창 세계잼버리가 펼쳐진 야영지입니다.
1991년 고성 세계잼버리에 참여했던 아내가 한마디하더군요. “여름에 엄청 더울 텐데…모기도 많을 거고."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전 5시30분에 뜬 해가 저녁 7시30분 수평선에 닿을 때까지 쉬지 않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서 모인 4만3000명이 텐트 그늘 하나에 의지해 작열하는 태양빛을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숲속에서 진행된 고성 세계잼버리는 설악산 덕분에 해가 일찍 저물어 늦은 오후에는 그리 덥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비가 와도 배수로만 적당히 파놓으면 물이 금세 빠졌다고 합니다. 반면 새만금은 애초 논으로 조성했기 때문에 야영지에 비가 오면 무논으로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던 셈이지요.
무려 32년 전 우리는 135개국 1만9092명이 참가한 17회 고성 세계잼버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경험이 있습니다. 우려스럽긴 해도 경험을 살려서 잘 치러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큰 오산이었습니다. 새만금 세계잼버리가 파국으로 치닫자 정부는 “정부 차원의 대회”로 진행하겠다고 말하더군요. 마치 그동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국무총리 비서실이 지난 5월17일 배포한 '한덕수 국무총리, 새만금 세계잼버리 현장 점검' 보도자료를 보면 ‘침수·폭염·인파 관리 등을 집중 점검했다’고 밝히면서 ‘이날 점검에는 공동조직위원장 기관인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외에 새만금개발청, 전라북도, 부안군이 함께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조직위원장 기관임을 명시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새만금 세계잼버리는 시작 전부터 국가 행사였던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스카우트의 구호는 ‘준비’였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 대회 치를 준비, 먹을 준비, 씻을 준비, 휴식할 준비 등등 수없이 많은 준비를 하고도 행사가 시작되면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늘 아쉬움이 남게 되는 것이 손님 치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를 엉망으로 해놓고 행사가 최악으로 치닫게 되자 책임자 찾기에만 골몰하는 형국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갈피를 못 잡던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관통한다는 소식에 8월12일까지 행사를 강행하겠다고 장담하던 정부도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서둘러 행사를 종료했습니다. 그 덕분(?)에 잼버리 참가자들은 끔찍한 새만금 영지를 조기에 벗어날 수 있게 된 셈이지요. 부디 한국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조금이나마 지우고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 손님치레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풍 카눈도 제발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고요.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다 보니 넋두리로 변해버렸습니다. 독자님께서도 혹시나 스카우트 단복을 입은 외국인을 보시거든 엄지척 한번 날려주시기 바랍니다. 참가비를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해외 참가자들에게 새만금 잼버리가 1년, 아니 10년은 우려먹고도 남을 최악의 잼버리로 기억되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국민들에 대한 좋은 기억은 조금이라도 가져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다시 한번 건강 잘 챙기시길 기원합니다.
-<시사IN> 제831호에 파행으로 치달은 새만금 잼버리에 관한 커버스토리가 실려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