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사IN> 경제팀 김동인 기자입니다.
얼마 전 섬유유연제 한 통을 다 썼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낸 뒤 혼잣말이 나왔습니다. “이제야 겨우 다 썼네.” 후련했습니다. 사실 사용하고 싶지 않은 향이었거든요. 몇 달 전, 인터넷 쇼핑몰에서 생필품을 담다가, 예산이 초과하는 걸 보고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들을 좀 더 싼 제품으로 갈아엎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 쓰던 것보다 조금 더 푸석푸석한 두루마리 화장지, 처음 보는 브랜드의 즉석밥, 그리고 문제가 된 섬유유연제를 배송 받았죠. 그런데 아뿔사, 처음 빨래를 돌리고 나서 정신이 혼미해지더군요. 누가 맡아도 잘 알 법한, 어쩌면 가장 평범한 향 가운데 하나였을 뿐인데. 마치 되감기 버튼을 누르듯 어렸을 적의 몇몇 풍경과, 그때 겪었던 감정과, 당시 느꼈던 좌절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그 저렴한 섬유유연제는 유년기 가장 가난했던 시절에 엄마와 할머니가 사용하던 제품이었습니다. 전기가 통하듯 찌릿한 느낌과 함께, 빈곤의 한복판에서 느꼈던 온도와 습도, 부엌에서 나던 냄새, 당시 얹혀살던 할머니집 거실에 내리쬐던 햇살까지 기억나더군요. 감각에 각인된 기억은 잔상이 짙었습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몸이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가난의 냄새’였고 순간적으로 움찔하게 되는 기억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경험을 털어놓으니 가까운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맞아, 그런 거 있어. 나도 꽈배기 빵 먹으면 배탈 나.” 아버지가 자식들 챙겨준답시고 검은 비닐봉투에 싸오던 꽈배기 빵이, 그 친구에게는 가난을 대표하는 감각이었다고 합니다. 시장통에서 꽈배기 빵을 사오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은 그 때 느낀 가난을 거부한다면서요.
섬유유연제도, 꽈배기 빵도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다만 이제는 굳이 찾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후각·미각으로 기억된 가난은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들거든요. 성인이 되었고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회인이 되었지만, 그 냄새와 맛을 다시 경험하는 순간 그 때로 절대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방어심리가 생겨납니다. ‘추억의 맛’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감각’과는 정 반대의 감각입니다.
갑자기 웬 청승일까요. 요즘 들어 문득 ‘보이지 않는 빈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거려서 그렇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세상이 가난을 보다 유려하게 숨기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소셜 미디어(SNS)에서 가난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졌습니다. 방송이나 올드 미디어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좋은 차는 어찌 그리 많고, 멋지게 꾸민 집들은 얼마나 많던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에서 가난은 점점 지워지고 감추는 무언가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들도 가난을 곧바로 건져 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사람들은 과거처럼 시장 바닥에서 일수 명함을 주워오는 게 아니라, ‘대출나라’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 사채와 만납니다. 청소년들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도박 중독에 빠지고, 가난한 청년 부부들은 싸게 당근을 내놓았을 때야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요즘에는 골목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아파트로 이주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이를 낳지 않으니까요. 어렸을 때에는 그렇데 선명하게 보이던 타인의 가난도 비대면이 일상이 된 요즘에는 감각하기 어려워졌다는 걸 느낍니다(물론 제가 서울에 거주하고, 가난과 점점 멀어져서 그럴 수도 있겠죠).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 한참 예민한 열 다섯 살짜리 친구가 가난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 친구는 유년기의 가난을 어떤 감각으로 기억할까?’ 몇 가지 가능성 높은 장면을 떠올려봤습니다. 액정에 금이 가도 바꿀 수 없는 스마트폰, 모바일 게임에서 아이템을 살 수 없어서 분하게 느꼈던 순간, 웹툰 결제가 부담스러워서 무료로 풀리기를 기다던 때, 아니면 마라탕 한 그릇에 부담을 느끼는 기억까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보니 적어도 제가 경험했던 가난과는 종류가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뭣보다 제가 가난을 감각했던 당시보다 지금이 ‘가난’과 ‘풍족함’ 사이의 간극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환경에 놓인 사람에게 일종의 ‘태도’를 요구하는 분위기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아이폰을 쓰거나, 최신형 스마트폰을 쓴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그것은 낭비일까요? 2019년 연말에 개봉한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죠. 그 영화에 말 안 듣는 아들내미가 한 명 등장하는데요. 아버지(리키)가 정학당한 아들의 스마트폰을 압수하자 이놈의 아들내미가 집을 나가버립니다. 불 같이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걔한테는 그게 곧 세상이야.”
저는 이 장면이 너무 얼얼했습니다. 왜냐면 배달 노동자에게도,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농촌에서 고립되어 지내고 있는 계절노동자에게도 스마트폰은 유일한 도구이자 무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 ‘돈도 없는 사람이 최신형 스마트폰이라니’라고 꼬집고 따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허탈함과 분노가 뒤따르곤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가난을 태도와 겉모습으로 증빙하라고 요구합니다. 그 요구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해 7월 논란이 된 ‘샤넬 선글라스’ 발언 기억하시나요? 한 실업급여 실무자가 “급여 수급자들이 해외여행에 가거나 일할 때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던 샤넬 선글라스나 옷을 사며 즐긴다”라고 말한 게 논란이 되었는데요. 당시 이 발언 역시 ‘가난을 태도와 겉모습으로 증빙하라’는 태도가 녹아들어 있는 말이었죠.
미디어의 책임이 클 것입니다. 직업인으로서 기자들은 가난을 보다 예민하게 감각하고, 빈곤의 원인과 매커니즘을 감각적으로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자일수록, 가난과는 점점 거리가 먼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기자들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네트워크는 기자 본인이 얼마나 풍요로운지와 별개로, 가난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변호사든 관료든 교수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이 업의 장점이니까요. 사회 속 가난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구조적으로 어떤 종류의 가난이 양산되고 있는지 밝혀야 하지만, 막상 기자만큼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지인이 많은 직업’도 얼마 없거든요.
가난한 사람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OECD 최고 수준이라는 노인 빈곤 문제도 계속 불거질 것이고, 급여는 그대로지만 물가는 계속 오르는 ‘실질적인 가난’도 부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난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난한 삶이 옮겨갈 수도 있고, 거리에서 가난의 흔적을 치우고 싶어하는 사람도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섬유유연제에 반응한 나의 이 감각과 예민함을, 어쩌면 계속 활용해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적어도 가난에 둘러싸인 사람이, 알아서 기자를 찾아오진 않을 테니까요. 사실 그래서 더더욱 ‘잘못 구입한’ 섬유유연제를 중간에 갈아치우기가 어렵더군요. 이 향에 반응하는 내 모습이 어쩌면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움찔대면서도, 계속해서 가난을 쫓아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