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사IN> 문상현 기자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물을 많이 마십니다. 물은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좋다고들 하는데, 저는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마시는 건 다른 물이거든요. 기자들은 똑같이 취재하고 있는 사안 중,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내용을 다른 기자가 먼저 보도했을 때 ‘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기자 명함을 처음 쓰게 된 지 약 10년, 다양한 맛의 온갖 물은 다 마셔봤다고 자부(?)하는데, 요즘 마시는 물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을 취재해왔습니다. 지난해 7월19일 사고 발생 직후부터 꾸준히 보도해온 이은기 기자에게 손을 보태고 있습니다(사실은 숟가락 얹기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여러 단독 보도가 나왔습니다. 순식간에 폭포처럼 쏟아진 ‘물’을 한꺼번에 들이켜 속이 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몇 번을 벌컥벌컥 마셔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물도 물 나름이지만, 제 반응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이유는 이 사건이 몸집을 불린 의혹만큼 사실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어서일 겁니다.
이해하기 복잡한 사건입니다. 대통령실과 군에 소속된 다양한 관계자들이 등장하고, 기자로 일하면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직함들도 보입니다. ‘사고’와 전후 정황에 대한 입장과 해석은 당사자들마다 극명하게 엇갈리고, 이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격노설’은 마치 유령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닙니다. 흐름을 파악하려면 주요 장면들이라도 살펴봐야 하는데, 2023년 7월17일, 18일, 19일, 30일, 31일, 8월2일 등 날짜만 나열해도 복잡하고 그 전후 사정을 안 볼 수가 없어, 단번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기자들도 사건 정리에만 상당한 시간을 쓸 수밖에 없는데, 지켜보시는 독자 여러분들도 혼란스러우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채 상병 순직의 원인과 책임자 규명을 해왔던 경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기관의 첫 번째 결론입니다. 앞서의 혼란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모았습니다. 핵심은 이번 경찰 수사의 핵심, 채 상병이 소속된 부대의 최고 지휘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 적용 여부였습니다. 임 전 1사단장의 책임 문제는 채 상병 순직 사고의 마지막 단계이자 대통령의 ‘격노’, 즉 수사 외압 의혹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임성근 전 1사단장에 대해 불송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건 관계자들이 제기한 정황들을 종합하면, 임 전 1사단장은 채 상병 순직 전부터 직접 실종자 수색 방식을 언급했고, 현장에도 방문해 상황을 챙겼습니다.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 특성상 최고 지휘관의 헛기침 한 번도 사실상 지침과 지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경찰은 채 상병 순직의 원인과 책임은 현장에서 실종자 수색을 지휘한 장교들에게만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적용 여부는 법리적으로 다툼이 많습니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크게 두 갈래로 나눠 보면, 우선 결과(사고) 발생 전 선행 사실, 정황 등을 모두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먼저 나옵니다. 채 상병 순직 사고를 예로 들면 임성근 전 1사단장의 행위와 발언이 없었다면 사고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른 주장은 사고 발생의 ‘직접적 원인’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선 현장에서 수색 작전을 챙긴 지휘관들이 직접적 원인 제공자이자, 책임자로 지목됐습니다. 대법원 판례, 실무에선 이 주장에 힘을 더 싣고 있습니다. 경찰은 이를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 수사 결과 발표에도 논란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추가 수사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점이 논란의 불씨입니다.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든 검찰이 재수사 또는 보강 조사를 요구할 수도 있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임성근 전 1사단장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사 중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느끼신 혼란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혼란의 본질은 분명 다른 곳에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 결과 관련 결재를 만 하루 만에 번복하고, 경찰에 넘긴 결과를 회수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정황이 뚜렷한데도(통신기록 등) “그런 사실 없다”라고 밝혀왔던 대통령실과 군입니다. 이들의 석연찮은 움직임 탓에 의혹이 커질 만큼 커졌고, 이러한 와중에 경찰 수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채 상병 순직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된 지휘관 중, 일부 지휘관들은 책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혹을 키우고 논란의 중심에 선 사람들은 어떤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편지 아닌 편지로 긴 글을 남겨드렸지만, 앞으로 독자 여러분께 전해드릴 이야기들의 예고편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더 이상 물먹지 않겠다는 다짐도 함께 전해드립니다. 늘 그래오셨듯 지켜봐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