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시사IN> 이상원 기자입니다. 늦더위에 안녕하신지요. 저는 8월 마지막 주 가족과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강원도 평창의 리조트인데, 성수기가 지났는데도 가족 피서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밀도가 그렇게 높은 곳은 오랜만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우리 사회의 새싹들이 움트는 광경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저 아수라장이더군요···.
리조트 근처에는 ‘이효석 문화제’ 홍보물이 많았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이 평창과 연관이 깊다고 합니다. 봉평은 이 작품의 배경이고 이효석의 생가도 인근에 있습니다. 봉평시장을 구경한 뒤 이효석 동상과 문학관 등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피어 있던 흰 꽃이 메밀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효석도 친일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친일 성향의 글을 쓴 적이 있고, 조선총독부에서도 일했습니다.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서 일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동료 문인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이효석은 지인과 문단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 컸던 모양입니다. 퇴근길 만난 한 청년이 “너도 개가 되었구나”라고 비난하자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이효석은 조선총독부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이효석이 없습니다. 2005년 언론 인터뷰에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이효석이 “총독부에서 근무했고 친일 성향이 농후한 글도 있지만, (친일 성향) 글의 반복성이라는 기준에 미흡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했던 인물”이고 “논란이 많았”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문학계에는 심지어 이효석의 몇몇 작품에서 숨겨진 저항 정신을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효석의 행적과 작품을 비판하는 측에서도 그의 삶이 불우했다는 데에 이견을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일찍 잃었고 자신도 요절했으며, 생전 일제에서 별다른 영달을 누리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장 인사 논란을 취재하면서 겪은 이른바 뉴라이트 인사들의 레퍼토리는 십수 년째 똑같더군요. 이를테면 “친일 인사를 명예 회복하자” “그들의 공과 과를 함께 들여다보자” “자학 사관을 바꾸자”라는 것이지요. 이효석의 사례처럼 ‘애매하면 친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게 <친일인명사전>의 집필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편찬에 참여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정말 확고한 자료를 토대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인사”들만 이 책에 실었다고 말했습니다. 대표 사례가 백선엽입니다.
뉴라이트의 주장을 접할 때마다 근본적 의문이 듭니다. 친일 인사로 꼽히는 자들이 굳이 명예가 더 필요할까요? 그들 대다수가 긴 명줄을 부여잡고 생전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사후에는 광장과 학교에 동상이 들어섰습니다. 후손은 재산을 물려받았고, 제자와 가신은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왜 역사학자들의 합치된 결론에 맞서, 이 복에 겨운 자들에게 우리 사회가 힘을 실어줘야 할까요. 이걸 비판하는 게 왜 자학일까요.
정부에서 입장을 확고히 밝히지 않는 이상 역사 논쟁도 멎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시사IN>도 이 문제를 계속 취재할 계획입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