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시사IN> 최한솔 PD입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들뜬 마음으로 지난 2주를 보냈습니다. 아시아 여성 최초이자, 한국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한강 작가라는 사실에 벅차올랐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나서야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전에 사두고 펴보지 못했던 <소년이 온다>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예상치 못한 소설의 구성과 잔인할 정도로 생생한 묘사, 한강 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체에 감탄하며 빨려 들어갔습니다.
<소년이 온다> 1장 ‘어린새’에는 동호와 정대, 그리고 정미 누나가 등장합니다. 정대와 정미 누나가 세 들어 살던 동호네 집 사랑채 단칸방부터 정미 누나의 일터인 방직공장, 동생 정대를 위해 학업을 포기한 정미 누나가 일을 마친 한밤중 방에 돌아와 동생 몰래 공부를 하는 모습까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문득 지극히 한국적인 이 풍경이 해외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가닿을지 궁금해졌습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을 영문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는 한국어를 배운 지 3년 만에 <채식주의자>를 읽고 한강 작가의 문체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합니다. 이후 번역은 물론 출판사 접촉에서 홍보까지 도맡으며 한강 작가의 작품을 영미권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데보라 스미스는 <대산문화> 2016년 여름호에 실린 ‘<채식주의자> 번역 후기’에서 번역 작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번역이란 번역인 동시에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라 쳐도, 이 자명함 뒤에는 번역에 관한 오해의 가능성이 도사린다. 번역은 ‘단 한 가지’ 해석을 낳지 않는다. 혹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번역은 새로운 독자들에게 원문이 지닌 다수의 가능성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하고, 동시에 번역된 작품을 접하는 새로운 독자들이 각자의 문화·정치적 프레임과 개개인의 인생과 독서 경험에 의해 틀 잡히고 결을 띠게 된 개별적인 주관에 따라 작품을 해석할 여지 또한 남겨주어야 한다. 번역가란 응당 - 편집자와 표지 디자이너, 홍보 마케팅 담당자와 마찬가지로 -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번역을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밝힌 것처럼, 데보라 스미스는 작품에 담긴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과 작가 특유의 문체를 살리면서도 영미권 독자들에게 이야기가 수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그만의 번역 세계를 구축하는 중입니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하면서는 영어 단어 ‘surely’의 사용을 두고 한강 작가와 오랜 시간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단어 하나에도 수많은 맥락과 정서가 담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반면 <소년이 온다> 번역판에서는 ‘형’ ‘언니’ 등의 단어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쓰기도 했습니다.
한강 작가는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이후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에 대해 “제 감정과 톤을 그대로 번역하셨다고 느꼈다”고 밝혔습니다. 번역을 해본 적도 맡겨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혹자는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고도 말합니다. 번역을 거쳐 다른 세계의 언어로 재창조되었음에도, 작품 고유의 향기와 메시지는 변치 않고 독자에게 가닿나 봅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스웨덴 한림원이 한강 작가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건,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사건을 다룬 한강 작가의 소설에 전 세계 독자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일을 나의 일로, 개인의 일을 우리 모두의 일로 확장시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문학의 힘’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세계문학전집’을 참 열심히 읽었습니다. 나와 문화와 말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당연하게 읽으며 ‘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곱씹곤 했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언어가 묻어 있는 작품들이 세계 곳곳에서 읽힌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금 내가 읽는 이야기가 바다 건너 저 멀리 어떤 독자와 공유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며, 더 열심히 우리 문학을 읽어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