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시사IN 장일호 기자입니다.
2024년 12월이 통으로 삭제된 기분입니다. 12월3일 밤, 비상계엄 포고령을 보는 순간 한동안 못 들어올 각오를 하고 닥치는 대로 짐을 꾸려 집을 나왔습니다. 편집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집을 나서며 동거인에게 한 마지막 말은 “우리 둘 다 한동안 집에 못 올 수 있으니까 고양이 자동 급식기 가득 채워놓고 나가”라는 당부였습니다. 내내 씩씩하다가 그 말을 뱉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12월3일 이후 벌어진 수많은 일은 계엄만큼이나 당혹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민주주의 역시 끝내 지지 않을 것임을 새롭게 알려주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12월14일 국회 탄핵 가결은 기쁜 일이었죠. 그 와중에도 저는 ‘무혈’이라는 말에 도취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윤석열 집권 2년 반 동안 이미 너무 많이 죽지 않았나요. 이번 탄핵 가결이 민주주의의 성취라면, 수많은 동료 시민의 주검 위에 꽂은 깃발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참담하고 절망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저를 격려합니다. 산 사람의 책임, 내 몫의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니까요.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윌북)의 저자 에즈라 클라인은 이렇게 씁니다. “한 시대에 통했던 것이 다음 시대에는 실패한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최대한의 진보와 가장 적은 폭력으로 다음 시대에 도달하는 것이다.” 앞으로 몇 달간 한국 사회에서 헌법재판소가 보다 더 중요해진 이유는, 그것이 ‘가장 적은 폭력’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야 합의를 명분으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를 결정한 한덕수 권한대행의 선택이 ‘내란 동조’ 더 나아가 ‘내전’을 선동·방조하는 일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12월에는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내란성 위염 및 불면’으로 좀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님도 저와 비슷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저는 보통 1년이면 150권 정도를 완독하는데(완독하지 못하는 책은 그보다 훨씬 많고요), 올해는 97권을 읽었습니다. 이맘때면 <시사IN> 송년호 ‘행복한 책꽂이’를 펴놓고 출판인들이 추천한 올해의 국내서·번역서 목록과 제가 읽어온 책의 목록을 비교해보는 독서 결산을 하곤 합니다. 올해도 나름 흡족했습니다. 출판인들의 선정 목록을 제가 꽤 따라 읽었더라고요. <커먼즈란 무엇인가>(빨간소금), <영화도둑일기>(미디어버스), <읽지 못하는 사람들>(더퀘스트) 정도가 ‘낯선’ 책이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저의 ‘올해의 책‘이었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유문화사)을 번역한 서제인 선생님이 ’올해의 번역가’로 꼽혀 기뻤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올해 나온 책은 아니지만 제가 꼽은 ‘올해의 책’도 적어볼까요. 님의 독서에 힌트가 된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사진과 정치폭력’이라는 부제가 달린 <무정한 빛>(바다출판사, 2023)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수전 린필드가 쓴 책입니다. 고통을 기록한 사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리터러시를 길러주는 수작입니다. 사진은 세상을 더 살 만하게 바꿀 수 있을까요? 사진 속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진의 폭로는 동시에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라는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고통의 기록이 저항의 기록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태현 선생님의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창비, 2023)는 2024년 제가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가장 비슷한 모양의 정치체제가 있다면 민주주의가 아닐까요. 민주주의는 피곤과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책은 두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는 것만 같습니다. 투표와 헌법 같은 제도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역시 성실히 검토해 나갑니다.
‘올해의 르포’로는 후배 김영화 기자가 쓴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메멘토, 2024), ‘올해의 (최고 귀여운) 국내 문학’은 <좋아하길 잘했어>(래빗홀, 2024), ‘올해의 (감동 심한) 만화’는 <사랑하는 이모들>(창비, 2022)을 꼽겠습니다. 해외 문학으로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시공사, 2019)를 꼽고 싶었는데, 절판되었네요.
“사람들은 노래가 다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엄마. 그러나 제 생각에는 딛고 설 땅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아마 스스로가 추락할까 봐 막으려고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요. 우리는 아마도 자신을 지키려고 부르는 것 같아요.”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
탄핵 플레이리스트에서 ‘다시 만난 세계’와 ‘농민가’를 번갈아 들으며 저는 이제 남은 또 다른 마감을 하겠습니다. 님이 꼽은 ‘올해의 책’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님이 알려주신 책으로 2025년 독서 목록을 꾸려보려 합니다. 그럼 2025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는 기자로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