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쌓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 시대를 관통하는 대유행이 불과 몇 년 뒤에는 시들시들해지는 모습을 몇 차례 순환하고 나면, 특정 시기에 아등바등하는 것이 무척 허무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러다 눈을 돌리면 현시점 열광적인 무언가에 대해서도 조금씩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 그런 경향은 강하게 나타납니다.
3~4년 전 금융시장을 기억하시나요? 코스피가 3000을 돌파하고 한국의 몇몇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이 전기차와 이차전지였고, 자산시장에서는 과열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시대 정신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요즘에는 ‘국장은 답 없다’는 표현이 푸념처럼 등장합니다. 글로벌 강달러 흐름 속에서 유독 한국 자산 시장은 조롱의 대상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금과 암호화폐, 미국 기술주가 오르는 마당에도 한국 증시는 오히려 하락세를 면치 못했으니까요. 한때 광풍이었던 부동산 시장도 다시 조용합니다. 지난해 하반기 정부 대출 규제 이후 무리해서 집을 사는 분위기도, 적극적으로 부동산 자산을 늘리라는 조언들도 잠잠해진 모습입니다.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집’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상당히 줄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신 너나없이 한마디씩 보태는 대상이 있죠. 바로 ‘달러’입니다.
달러를 들고 있냐, 아니냐. 아마 지난해 하반기 이후 ‘돈 이야기’를 일상에서 하는 분들은 이 주제를 한 번쯤 언급해보셨을 겁니다. 환율이 1달러에 1450원을 넘긴 시점부터는 이제 현실감각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 겪는 일이니까요. 환율이 이렇게 무너진 데에는 12·3 쿠데타의 여파도 있겠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우려도 영향이 있었겠죠.
그럼 ‘열광’의 사이클이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시큰둥’의 시간이 돌아올까요? 환율은 정상화되고 한국 기업은 다시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까요? 문제는 ‘열광’ 속에서 냉정하기 쉽지 않고 ‘시큰둥’의 한복판에서 홀로 열정적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터널의 끝이 언제일지 모를 컴컴한 환경에서 지금의 환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지금을 되돌아본다면, ‘그땐 그랬지’라고 쉽게 회고하겠지만 현실과 현재의 한복판에서 냉정하게 우리 경제를 진단하거나 향방을 논하기란 어렵습니다. 섣불리 ‘예상’을 남발하다가 손가락질 받는 사람도 여럿 봤으니까요. 저는 자산시장 전문가도 아니고, 경제 예측에 커리어를 건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새해를 맞이하는 이 순간 경제 전반에 대한 불안을 품은 이들이 주변에 많아지고 있다는 점 하나는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소비자의 지갑도 닫혔고요. 이건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더 크게 체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환율의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바랍니다. 달러 자산에 대한 ‘열광’도 가라앉길 바라고요. 하지만 ‘사이클이 다시 돌아서 괜찮은 시간이 올 거야’라고 무작정 낙관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낙관론이 우세할 때에는 좋은 것들만 보이지만, 비관론이 강할 때에는 평소에 눈 감았던 위험 요인들이 눈에 밟히니까요. 가계는 여전히 빚이 많고, 젊은 인구의 역동성은 줄어든 것처럼 보이고, 빈 점포가 출퇴근길에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기자들은 낙관론이 우세할 때 비관적 요소를 언급하는 걸 꽤 익숙하게 해냅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낙관적인 기사를 쓰는 게 비관적 기사를 쓰는 것보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때에는 독자분들께 송구할 때가 많습니다. 호시절에 삐딱한 기사는 꽤 썼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우울한 시기에 희망이 될 만한 이야기를 풀어내본 적은 얼마 없는 것 같습니다. 경제는 열광과 시큰둥 사이를 오갈지 모르겠지만, 기자들은 막상 ‘상온 상태’가 시큰둥 쪽인 경우가 많습니다.
밝은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암담한 소식을 전하더라도, 그것에 공포를 담지는 않으려 애써보겠습니다. 시대가 우울하더라도 그 기분에 잠식되어 대안 대신 불평만 늘어놓지는 않으려 힘쓰겠습니다. 무엇보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여야가 합의해서 정치적 혼란을 끝내자’는 식의 무책임한 보도는 지양하겠습니다(듣기 좋은 표현으로 지금의 헌정 붕괴를 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열광과 시큰둥이라는 사이클의 영향에 너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