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김동인입니다.
2월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네요.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맞은편 건물 징크(아연) 지붕에는 눈발이 얇게 쌓였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올겨울은 어땠나요? 쉽지 않은 계절이었다는 건 모두 공감할 겁니다. 민주주의의 적들에게 단호하게 헌정을 지키겠노라 소리 높였고, 그 ‘적’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체감하며 좌절의 밤을 보내기도 했죠. 그래서 올겨울은 낙담과 희망이 교차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몰상식이 헌정을 파괴하는 순간을 맞이함과 동시에, 거리에서 만난 많은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겨울을 견뎌주어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요!
정신없이 보낸 겨울이었지만, 어떤 분들께는 송구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영업자분들의 고통은 감히 저 같은 월급쟁이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더군요. 내수경기가 무너졌다는 건 지난해 내내 반복된 진단이었지만, 연말연초의 사정은 더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상행위의 개념이 크게 흔들리며 우리는 부러진 내수의 흔적을 거리에서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빈 상가를 통해서 말이죠.
엊그제 오랜만에 강남역 인근에 나갔습니다. 저는 서울에 살고 있지만 서울 동쪽은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 광화문 인근에 직장이 있고, 취재 때문에 여의도를 자주 들르지만 강남 방향으로 갈 기회는 많지 않더라고요. 집도 서쪽 방향이라서요. 그런데 오랜만에 들른 강남역 일대에는 ‘빈 상가’가 정말 많더군요. 한국부동산원 자료에도 강남 일대 중대형 상가 열 곳 중 한 곳이 비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충격적이었습니다. 원인은 단순합니다. 해당 상가 월세를 낼 만큼 매출이 발생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무너진 내수의 한 단면일 겁니다.
저는 2023년 가을에 ‘상가 공실 주의보’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현장도 찾아가보고, 데이터도 뒤져보면서 한국 사회에 필요 이상으로 상가가 공급되어 있고 젊은층의 양적 축소(인구 감소)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상가 공실 문제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결은 이제 서울에서도, 신촌을 넘어 강남역 일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촌과 강남역은 어릴 적 사회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대표적인 ‘부도심’입니다. 얼마 전 서울 서대문구는 신촌 일대의 ‘차 없는 거리(대중교통 전용지구)’를 11년 만에 폐지했습니다. 승용차가 오가게 되면 상권이 살아날 거라 기대한 것인데요.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고민이 강남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점에서 공실 문제의 충격은 큽니다.
많이들 이렇게 반문합니다. 어차피 비싼 임대료를 계속 받으려고 건물주들이 버티는 것 아니냐고요. 그 말도 맞습니다. 특히 잘나가던 상권에서 상가 공실이 발생하면 건물주들은 한동안 버티는 전략을 택합니다. 그래서 상가 임차료는 경기에 따라 인하하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문제는 다른 변수가 그대로인 채 내수만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버틴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죠. 이전 기사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상권을 부지런히 오가는 세대(특히 젊은 세대)의 축소, 그리고 상행위의 온라인화가 오늘날 상권 붕괴의 더 큰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경험 소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특정 공간에서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만족감을 느끼고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제 지출도 그런 경험을 풍부하게 만족시켜주는 곳에서 발생합니다. 내수가 꺾인 것도 사실이지만 신촌이나 강남역 같은 도시 공간이 요즘 세대에게 그런 경험적 만족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당 상권에서 노력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손님의 수는 줄었고, 손님들이 오프라인에서 쓰려는 돈의 총량도 줄었으며(어지간해서는 온라인에서 소비하기 때문에), 그런 손님들이 거리에서 쏟으려는 ‘시간의 총량’마저도 감소하고 있습니다. 기왕 시간을 쓴다면 경험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으로 이동하려 하니까요. 요컨대 신촌과 강남역은 오늘날 서울에서 상대적 매력도가 점차 낮아지는 잠재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내수가 꺾이면서 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죠.
그런데 이 문제를 꼭 서울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서울만 그동안 살 만했을 뿐, 지역 구도심 상권이나 수도권 신도시 상권은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니까요. 무엇보다 지금까지도 신규 택지지구 이곳저곳에서 상가 공급량을 엄청나게 늘려놓았습니다. 상권은 집적효과가 중요합니다. 가급적 점포끼리 촘촘하게 이어져 있어야 사람들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돈을 쓸 수 있죠. 하지만 물리적으로 상가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더라도, 점포와 점포 사이에 빈 상가가 발생하면 실제 밀도는 낮아집니다. 경기도 신도시에 물 밀듯 쏟아진 상가들은 조성 당시 바라던 (영업 중인) 점포의 밀도를 달성하기 어려워합니다. 가게들이 듬성듬성 영업하는 상권은 수명이 단축됩니다. 특히 경기·인천 지역 분들은 자차로 이동해 특정 상권을 방문하는 경향이 강한데요. 한번 꺾인 상권을 구태여 차로 직접 다시 찾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택지지구 개발 단계에서 상업용 토지는 비싸게 팔립니다. 땅을 파는 사람도, 땅을 사서 건물을 지어 올리는 사람도 직접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행사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분양해 팔아버리면 그만이니까요.
저는 최근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려면 서울보다는 경기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역이라는 권역에 공실이 넘치기 시작해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이미 경기도에서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오래된 미래’입니다. 고양 일산 라페스타-웨스턴돔, 인천 송도 커널워크, 안양역 지하상가, 시흥 배곧, 하남 지식산업센터 단지들, 평택 신규 상업지역 등등. 각자 동네에서 경험하는 기묘한 쇠락은 경기도 전체로 볼 때 도시 기능의 붕괴로 조금씩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쇠락’은 주기가 빨라졌습니다. 최근 기업회생 절차를 밟기로 한 고양시 복합테마파크 ‘원마운트’는 개장한 지 고작 12년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우리는 팽창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도시 기능을 재정비하기보다는 어딘가에 신도시를 지어 확장하기를 바랍니다. 지방 도시마다 도시 기능을 새로 세팅한 ‘꿈같은 새 도시’를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계에는 늘 사람들이 오가며 풍부한 물자(돈)를 주고받는 상권 형성을 당연한 그림으로 여겼고요. 하지만 전체 인구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반면 점포의 수만 늘어나 다 같이 쇠락하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새로 만든 곳도 사람이 부족하고, 과거에 부흥했던 원도심도 사람이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그런 변화의 조짐이 강남역이라는 상징적인 공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열심히 가게를 일구고, 지역사회와 공생하려 한 대다수 자영업자분들께는 어쩌면 암담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자영업이 힘든 건 초기 자본을 많이 들이는 탓에 가게를 정리하고 다른 출발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입니다. 권리금을 많이 지불하고 영업을 시작하신 분일수록 더욱 그렇겠죠. 팽창은 관성을 만들어냅니다. 여전히 한국 도시행정과 도시개발은 ‘팽창하던 때의 관습’을 잊지 못한 채 더 많은 상가를 허가하고 건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팽창의 피해를 입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결과적으로 각자도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팽창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있는 자원을 잘 정비할 수 있는 행정적인 노력과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이제 축소는 생존을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의 원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충격을 완화하는 축소 방식인지, 어떻게 우리 사회가 축소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저는 이 문제를 앞으로 더 깊이 고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