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의 외할머니는 올해 구순을 맞았습니다. 당신의 자식 셋과 그 자식 셋이 낳은 자식들, 그리고 그 자식들의 자식들까지. 꽃이 피는 봄이 오면 사대(四代)가 한데 모여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치매가 나날이 심해져 얼마 전 요양원에 입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십 년 전 돌아가신 당신의 큰오빠를 만나러 가야겠다며 홀로 집을 나섰다가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일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들이 대개 그렇듯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는 외할머니는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크게 절망하지 않으시는 듯 보였습니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순차적으로 잊어버리고 마는 이 무서운 병이 주는 고통은 오히려 주변 가족들의 몫이었습니다. “전쟁 통에도 ‘국민학교’를 다닌 걸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던 이인데, 동네에서 글씨를 최고로 멋있게 잘 쓰던 이인데, 네 외삼촌 이름을 듣더니 “그건 누구냐?”라고 하시더라.”
병세가 깊어질수록 가족에게 주어진 슬픔의 무게도 커져갔지만, 속절없이 말라버리고 마는 기억의 샘을 채우며 외할머니를 다시금 살아가게 하는 것도 다름 아닌 가족이더군요. 그의 한평생이 얼마나 근사했는지, 그의 곁에 얼마나 든든한 가족이 함께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지치지 않고 이야기해주는 것 말이죠. “잊지 않을게”라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2. 202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최근에야 보았습니다. 영화는 공권력의 총칼이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제주 4·3 사건, 그 치욕의 시간을 살아낸 다섯 할머니의 증언을 담았습니다. 고요한 제주의 자연을 보여주다 화면이 전환되면, 울다가 지쳐 늙어버린 생존자의 얼굴을 비춥니다. 무심한 말투로 읊조리는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살아서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픈 과거의 기억이 ‘제발 좀 잊히기를’ 바랐을 할머니들의 곁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기를 멈추지 말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주4·3도민연대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재심 재판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할머니들은 마침내 무죄를 인정받았습니다.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판결과 별개로, 4·3 사건이 우리 땅에 입힌 상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기억하는 일’이 생존자만의 몫으로 남지 않으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길가에 놓인 ‘돌들조차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요. “잊지 않을게”라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3. 2025년 4월4일 11시22분. 마침내 ‘대통령 윤석열’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 비상계엄 선포부터 국회 탄핵안 가결, 구속과 구속취소, 그리고 탄핵 인용까지. ‘너무 생생하게 기억해서’ 고통이고, ‘언젠가 기억에서 잊힐까 봐 두려워서’ 고통이던 위기의 순간들을 흘려보내고, 이렇게 우리가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났습니다. 돌이켜보니, ‘기억의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위대합니다. 이제 다시 새로 시작해야지요. “잊지 않을게”라는 약속과 함께 말입니다.
이제야 진짜,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