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음식을 잊고 삽니다. 마트에 들러 식재료와 과일을 살펴보긴 하지만 비닐하우스로 재배하는 작물이 워낙 많다 보니 ‘이 채소가 지금 나오는 게 맞나?’ 하고 갸웃거리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여러 지역을 취재차 다니면서 계절에 꼭 맞는 음식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맞으며 햇것들을 안겨주시는 환대에 “고맙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뭐가 있는지 한참 찾았습니다. 저는 얼마 전 ‘지구도 살리는 마을’ 취재를 위해 여주시 구양리와 대전 대덕구 미호동, 인제군 신월리 달뜨는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6월18일, 처음 방문한 곳은 여주시 구양리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는데요. 점심시간을 앞두고 마을회관을 찾았더니 모든 주민이 공짜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에서 군침 도는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이날의 메뉴는 깔끔한 잔치국수. 기사에 쓰진 않았지만 식사를 하고 나서도 삼삼오오 모여 반주를 기울이며 비 오는 날의 정취(?)를 즐기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난해부터 마을 공동 창고와 풋살장 지붕 등에 태양광 패널을 올리고 마을 공동의 재생에너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재생에너지를 한국전력공사에 팔아 한 달에 1000만원가량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는데요. 개인에게 그 수익을 나누지 않고 ‘살 만한 마을(사실 이장님은 계속 ‘부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을 만드는 데 쓰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큰 돈을 어디에 쓰려는 걸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마을 청장년회가 조성한 기금으로 어려운 주민을 돕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전주영 이장)”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미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해온 전력이 있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마을을 떠나며 당부를 했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선례를 남겨달라고요. 곳간에 두둑한 쌀을 개인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쓰는 방법을 발명해달라고요. 그럼 구양리의 비법을 전수받은 다른 부락들 역시, 주민들이 주인이 되어 만드는 재생에너지로 새로운 지역의 자원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실 점심 공짜밥 맛으로도 저는 구양리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휴, 살림이란!).
취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나는 저와 이명익 기자에게 마을 주민 한 분이 하지 감자를 챙겨 주셨습니다. ‘감자 하나’ 가져가라고 하시더니 한 박스를 주시더군요. 받아도 되나, 망설였지만 호쾌하게 건네시는 것을 깍쟁이처럼 고사하기가 싫었습니다. 저도 호쾌하게 받아들고 주변에 아끼는 이들에게 나누었습니다. 요며칠 그분 덕분에 포슬포슬한 햇감자의 식감을 맘껏 즐겼습니다. “감자는 역시 완전식품이야” 중얼거리면서요. 지역 취재는 언제나 환대라는 이름의 선물을 한 아름 받아오게 됩니다.
한낮 온도가 30℃까지 올랐던 6월18일, 저와 신선영 기자는 대전시 미호동 넷제로 공판장을 찾았습니다. 인터뷰를 한다고 통문을 활짝 열어놨는데요. 지글거리는 햇빛을 뚫고 마을 주민분들이 먹을 것을 들고 오셨습니다. 넷제로 공판장을 관리하는 에너지전환해유 협동조합 담당자들에게 고령의 주민분들이 살구와 과일청을 가져다주셨습니다. 그 덕에 저와 신선영 기자도 물에 막 씻은 보드라운 살구와 시원한 오미자청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이란 몰랑거리고 새콤한 것이더군요.
닷새 후에 박미소 기자와 찾아간 강원도 인제군 신월리 달뜨는 마을에서는 냉장고에 차갑게 식혀둔 앵두를 대접받았습니다. 앵두라니! 저와 박 기자 둘 다 참지 못하고 몇 알을 냉큼 집어 오물대며 먹었습니다. 김경림 사무장님이 저희를 위해 일찌감치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며 선뜻 웃으셨습니다. 그날 본 것과, 그날 들은 것은 모두 혀끝에 차갑게 맴돌던 앵두 맛과 함께 떠오릅니다.
세 지역 취재를 모두 마치고 기사를 마감한 후에도 저는 감자와 살구, 앵두 맛이 자꾸 기억났습니다. 아니, 어쩌면 맛이 아니고 그때 그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심고 거두고 딴 것들을 누군가에게 기쁘게 건네주는 그분들의 모습을 기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그들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기자에게 취재란 일입니다. 기자가 되고 나서 내향성이 폭발해버린 저는 때로는 취재가 싫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들에게 마치 뭘 맡겨놓은 사람처럼 불쑥 속깊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는 것도 성정에 맞지가 않습니다. ‘나, 여기까지인가···’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씩 이런 만남들이 생깁니다. 분명 일을 하러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추억을 잔뜩 얻어오는 날 말입니다. ‘내가 대체 뭘 했기에 이분들이 나에게 이런 것을 준 걸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늘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무람없이 타인에게 건네는 거라고요. 그것이 꽤 낭만적인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가, 저 역시 낭만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감자와 살구와 앵두를 건네는 사람. 어떤가요. 꽤 그럴싸하지요? 아무래도 올여름은 그런 사람이 되어보아야겠습니다.
벌써부터 무덥습니다. 독자님은 어떤 여름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우선 물을 많이 먹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콩국수를 많이 먹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다음엔 낭만적인 것을 하나씩 모으는 분이 되시기를. 독자님에게 당부했듯,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 김다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