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시사IN> 권은혜 기자입니다. 올해 2월에 입사한 따끈따끈한 신입 기자입니다. 님께 뉴스레터로는 처음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뉴스레터 독자님께 어떤 얘길 해볼까 하다가 제가 오랫동안 좋아해온 만화영화 하나를 소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월트 디즈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뮬란>(1998)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심심하면 틀어놓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버 좀 보태서 대사를 줄줄 따라 읊을 수 있달까요(물론 더빙판 한국어 대사입니다).
이 영화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위(北魏, 386~534년) 후기에 만들어진 작자 미상의 ‘목란사(木蘭辭)’라는 중국 장편 서사시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혼란한 시기, 화목란이라는 여성이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전쟁터에 나가 12년 동안 혁혁한 공을 세운다는 내용의 시인데요. 실화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만화영화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공식 시놉시스를 요약해 가져와 보았습니다.
‘파씨 가문의 외동딸 뮬란은 선머슴 같은 성격 때문에 중매를 볼 때마다 퇴짜를 맞는다. 때마침 흉노족의 침입으로 징집 명령이 떨어지고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장을 하고 나선다. 조상들이 대책회의를 통해 보낸 무슈의 도움을 받으며 남자들 사이에서 힘든 군사훈련을 견뎌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중대장 리샹에게 사랑을 느끼는 뮬란. 전쟁 중 눈사태를 이용하여 흉노족을 무찌르는 기지를 발휘하지만, 부상을 치료하던 중 여자임이 밝혀진다. 리샹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지만, 부대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모두 도망 간 줄 알았던 흉노족의 황제 음해 계획을 알게 된 뮬란은 동료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여 영웅이 된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합니다. 초딩이 수많은 공주들이 나오는 디즈니 영화 중에서 하필이면 이 영화에 빠진 이유는 단 한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아픈 아버지를 전장에 보낼 수 없던 왈가닥 소녀가 가문 대대로 물려온 칼을 빼 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아버지의 갑옷을 입는 장면이요. 심장을 쿵쿵 울리는 장엄한 음악을 배경으로 금기를 거스르고 아버지와 가문을 구하러 가는 뮬란의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 떨리게 만드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은 어릴 때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만화영화를 성인이 된 후 다시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실 제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이 만화영화를 다시 찾게 된 건 페미니즘에 눈을 뜬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정의하고 나서 어린 시절 봤던 <뮬란>을 다시 보니 새롭게 감동받게 된 장면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 한 장면은 바로 리샹 중대장이 오합지졸 군대를 훈련하는 부분입니다.
아버지 대신 군대를 이끌게 된 리샹 중대장은 훈련 첫날 높은 나무 기둥에 화살을 쏩니다. 제군들에게 무거운 추 두 개를 매단 채 화살을 빼오게 시키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죠. 리샹은 그들을 향해 소리칩니다. “훈련 시작하자! 승리를 위해! 계집애들같이 왜 이리 약해? 한심하기가 짝이 없어. 그렇지만 두고 봐라. 만들어낼 거야, 대장부.” 나약한 남성을 대장부 군인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 시작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뮬란> 사운드트랙 ‘I'll Make a Man Out of You(대장부로 만들어주마)’가 흘러나오는 시점입니다(가사 “Be The Man!”을 “대장부!”로 바꾼 천재 번역가에게 경탄을 보내며!).
징병된 남성들은 누구는 힘이 없고 누구는 몸이 뻣뻣했습니다. 누구는 너무 살쪘고 누구는 비쩍 말랐습니다. 엄혹한 훈련을 낑낑대며 겨우 따라갑니다. 그중 가장 뒤처지는 건 바로 남장한 여자인 뮬란입니다. 집에서 닭에게 모이나 주고, 신부 수업이나 받던 아가씨에게 훈련이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타고난 체력이 남성 동료들보다 모자랄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뮬란은 훈련 내내 민폐를 끼치고 동료들에게 괴롭힘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뮬란은 리샹에게서 “집으로 돌아가라. 너 같은 약골은 힘들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이제 시작입니다. 늦은 밤 집으로 향하려던 뮬란은 뒤를 돌아 화살이 꽂힌 기둥을 쳐다봅니다. 동이 트는 아침, 모두가 잠들어 있던 훈련소에서 중대장 리샹이 말한 화살을 뽑아낸 사람은 결국 뮬란이 됩니다. 뮬란이 다른 동료보다 키가 크거나, 힘이 세서, 혹은 날렵해서 이뤄낸 성과가 아닙니다. 팔에 묶인 추를 짐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대로 사용하여 기둥 정상에 오른 것이지요. ‘남자’가 되라는 군대, ‘여자’는 받아주지 않는 군대에서 ‘힘’이 아닌 노력과 요령이라는 또 다른 실력으로 메달을 따낸 것입니다. 그때부터 훈련이 점점 진행될수록 뮬란은 한 걸음 한 걸음 ‘군인’으로 거듭납니다. 매번 뒤지던 산행에서도 앞서나가기 시작하죠. 저는 이 훈련 장면에서 ‘남자’를 키워내려는 군대의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모호한가, 훌륭한 군인을 규정짓는 기준은 단순히 ‘힘’으로 대표되는 신체적 조건만은 아니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남자만이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시대적 금기를 실력으로 깨트린 뮬란이 얼마나 발칙하고 기특한지요!
뮬란의 이런 비범한 실력은 또 다른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영화 후반부, 리샹의 군대는 설산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사병 규모를 가진 흉노족을 마주합니다. 규모도 실력도 한참 떨어지는 오합지졸 군대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뮬란이 보여준 기지는 놀랍도록 탁월합니다. 마지막 대포 한 발을 가지고 적장 한가운데로 들어가 눈사태를 일으킨 것입니다. 뮬란은 적군을 싹쓸이하고 죽어갈 위기에 있던 중대장 리샹을 구해냅니다. 그러나 뮬란은 이때 입은 부상으로 여성임이 들통납니다. 그리고 결국 리샹과 동료들로부터 설산에 버려집니다. 군대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유하고, 훌륭한 판단력으로 흉노족을 거의 말살시킨 데다, 중대장과 동료를 살렸음에도요. 백 번을 다시 봐도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그 추운 설산에 버리고 가다니요. 뮬란도 이해가 가지는 않습니다. 그런 중대장에게 사랑에 빠져 결국 결혼하니까요.
반대로, 제가 좋아하는 인물도 소개해볼까 합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제국의 적인 흉노족의 장군 샨유입니다. 그에게는 자세한 사연도 부여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인물로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제가 샨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영화를 통틀어 뮬란을 성별로 재단하지 않고 그녀의 대담함이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한 건 이 사람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샨유는 황제를 죽이기 위해 만난 황궁에서, 설산에서의 모습과 달리 여성임이 명백한 뮬란의 차림에도 진심으로 맞서 싸웁니다. 뮬란은 심지어 칼이 없어 부채로 맞서는데도요. 흉노족의 대장이라면 여성을 적수로 생각하지 않을 법도 한데요. 수많은 날을 함께 먹고 자고 훈련하며 동료애를 쌓은 리샹은 뮬란이 여자라는 걸 알자, 설산에 버린 것과 비견되지요.
사실 지금의 시대정신으로 본다면 한계도 많습니다. 아무리 원작을 반영했다 하더라도, 오랑캐를 처치하고 황제를 구한 주인공이 가정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만화영화 <뮬란 2>는 심지어 뮬란의 동료인 세 남자의 짝을 찾아주는 내용입니다. 뮬란이 리샹과 결혼하고도 멋지게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할망정! 그러나 이 영화 만들어진 시점이 1990년대이고, 실제 작중 배경은 지금보다도 성차별이 훨씬 심했을 4~6세기라는 걸 기억한다면 이 정도면 정말 혁신적인 내용이 아닐는지 제가 대신 변명해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뮬란이 어머니가 쥐여준 꽃 모양 머리핀을 버리고 갑옷과 칼을 드는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자도 할 수 있어!”라는 알파걸 담론이 지배하던 때에 학창 시절을 보내서일까요.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뮬란에게는 어머니가 쥐여준 머리핀도, 뮬란이 스스로 쟁취해낸 가문의 칼도 둘 다 중요했을 것이라고요. ‘여성이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뮬란에게 짐이라면, ‘머리핀이 아니라 반드시 칼만 들어야 해’라는 말 역시 자유로운 뮬란을 제한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꽃 머리핀과 칼 모두 가지고 때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권리일 것입니다.
이 글도 <뮬란>을 보면서 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뮬란에 대한 사랑을 주변에 전파해왔는데 ○○○님께도 전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번 주말에는 <뮬란> 만화영화를 시청해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단, 무조건 더빙판이어야 합니다. 19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우진(그 유명한 <이누야샤> 가영이 퇴사 짤 정미숙 성우, <원피스> 상디 김일 성우, <스펀지밥> 뚱이 이인성 성우 등)이 한자리에 모여 불꽃 연기 쇼를 보이는 모습을 관람하셔야 하니까요! 역사에 길이 남을 <뮬란>의 사운드트랙을 한국어판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덕심을 풀다 보니 편지가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길고 긴 뉴스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권은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