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김수혁 기자입니다.
저는 얼마 전 기쁘게도 <시사IN>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지면이 아닌 유튜브 구독자분들께도 인사드릴 기회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극우 특집’으로 준비된 방송이었습니다. 별다른 전문성이 있어서는 아니고,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입사 이후 극우 집회라 불리는 현장에 찾아갈 일이 비교적 자주 있었습니다. 하여 ‘극우 참관인’ 자격으로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댓글을 통해 비슷한 내용의 불만을 여럿 접수했습니다. 요지는 ‘왜 극우 시위대에게 존칭을 사용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극진한 경어 사용이 저로서는 일종의 야유 섞인 반어법이었는데, 잘 와닿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원하기만 하면 마음 놓고 그들을 경멸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정선거 음모론자’ ‘배타적 극우주의자’라고 하면 어떤 얼굴이 떠오르시나요? 대로에서 “반국가세력 나가 X질 때까지 이 노래를 멈추지 맙시다” “짱X 북X 빨X이는 대한에서 꺼져라” 같은 호전적인 가사의 노래를 신이 나서 부르는 사람들, 흰 천에 손 글씨로 “용공 이적 세력 소탕하여 나라 기강 바로잡자” “정신무장하여 반공전사로” 같은 문구를 휘갈겨 쓴, 자유당 스타일의 현수막을 펼쳐 들고 거리 행진을 벌이는 사람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된 지난 대선은 사기고 지금 대통령은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미국 대사관 앞에서 성조기를 흔들며 “USA”를 외치고 중국 대사관 앞에서 오성홍기를 찢으면 미국이 개입해 이재명을 쫓아내고 윤석열을 복귀시켜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요. 눈을 감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세요? 그분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7월18일, ‘문제의 인물’ 모스 탄이 연사로 나서기로 예고된 집회에 취재차 다녀왔습니다. ‘전 미국 국무부 국제형사사법대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는 한국의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였으며, 그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요. 그날 제가 따라다닌 시위대는 종각에서 출발해 집결지인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무대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그곳에서 모스 탄이 마이크를 잡을 예정이었죠.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차도에서 행진하고 있는 시위대로부터 벗어나 인도로 올라왔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시위 행렬을 지켜보고 있는 중년 남성이 제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죠. 정말로, 풍신이 근사한 사나이였습니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 캐러멜색 뿔테 안경에, 믿음직해 보이는 각진 턱, 떡 벌어진 어깨와 꼿꼿한 허리, 우리 아버지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디자인과 재질의 피케 티셔츠.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 순간 제 눈에 그는 지성과 건강을 겸비한 품위 있는 중년 남성의 표상 같았습니다. 저는 눈빛만 보아도 우리 사회를 향한 그의 합리적이고 충심 어린 염려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틀림없이 쓸 만한 멘트 한 줄은 건지겠다는 생각에 저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분들 시위하는 걸 보니 어떠세요?”
남자는 저를 흘끔 쳐다보더니 결연한 어조로 대답하더군요.
“이렇게 일어나야 돼. 아주 가슴이 뭉클해요!”
아차 싶었습니다. 우리의 선입견은 얼마나 손쉽게 세상을 멋대로 재단하고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굳건한 사실이라도 되는 양 믿어버리게끔 만드는지요. 차도를 벗어나 인도로 올라서며 저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금이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그 금 양쪽을 손쉽게 넘나들 수 있다고, 금 양편의 사람들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쪽만이 아니라 이쪽에도 있었는걸요.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는 사람들, 흐뭇한 표정을 하고 핸드폰 카메라로 시위대의 모습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그들은 제 옆에,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볼까요? 제 답은 “모르겠다”입니다. 저는 그들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어요. 그날 목격한 시위 행렬로부터 구호와 시위용품을 거둬들이고 저를 그들 맞은편에서 걸어가도록 만든다면, 저는 아마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여기가 을지로나 여의도 어딘가는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종잡을 수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들은 저나 여러분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쇼핑몰에서, 번화가 길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행진 도중 제가 멘 가방 끈이 어느 시위 참가자의 가방에 달린 우산살 끄트머리에 걸려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앞서가자 제 가방이 그를 따라가고, 제 가방이 저를 끌어당겼어요. 저는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그는 대답했죠. “어이쿠 걸렸어요? 괜찮습니다. 하하하.” 저는 이 일이 어떠한 암시, 또는 상징처럼 느껴졌더랬습니다. ‘우리’와 ‘그들’에 대한 암시. 아니, 보다 정확히는 뒤엉키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의 실체에 대한 섬뜩한 직감이었다고 할까요. 저는 더 이상 그들을 그저 괴짜, 한 줌, 마주칠 일 없는 이상한 존재로 치부할 수가 없습니다.
시위대가 서울역 광장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자칭) ‘보수 유튜버’ 고성국 박사가 감복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시위대를 맞이하고 있더군요. 그날 그 순간의 제 마음을 헤아려보시겠어요? 그가 어찌나 밉던지요. 갈 곳 없는 원망을 그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게 저자로구나! 저자가 우리 이웃들의 귀에 속삭인 요설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저는 고 박사 면전에 욕을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고개를 떨궈야 했습니다.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 뭡니까. 제가 봤을 때 고 박사는 주먹이 아주 매울 것 같거든요. 그렇지만 결코 제가 그에게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아직은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패배가 목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패배는 언제일까요? 우리가 이해하기를 포기할 때, 대화하기를 멈출 때, 속 편하게 경멸하기를 선택할 때,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을 모두 빼앗겼을 때가 아닐까요? 흠, 떠들어놓고 보니 역시 패배를 면하기란 쉽지 않은 과업 같군요. 또 대책없이 한가한 소리 같기도 합니다. 독자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 김수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