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독자님. <시사IN> 편집소통팀의 김연희 기자입니다. 입추가 지나자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선선한 기운이 반갑고, 그러다가도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에 서로의 안부를 염려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이번 편지는 조금 사적인 얘기를 써보고 싶습니다. 사적인 질문을 던지면서요. 님은 ‘최애’가 있으신가요? 아이돌이든, 드라마 시리즈든, 게임이든, 최고로 애정하며 열렬히 아끼는 무언가요. 저는 사실 이런 질문을 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천문학이나 야구처럼 간헐적으로 가늘게 관심을 갖는 대상들은 있지만 (오래 응원해온 야구팀의 순위를 모른다니 할 말 다했죠.) 모든 걸 다 쏟아부을 듯이 소위 ‘덕질’을 해본 적은 없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덕력’을 갖춘 사람들을 긴 시간 동경해왔어요. 현실이 구질구질하고 폭삭 망한 것 같은 날에도 온 마음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최애가 있다면 잠시나마 세상사의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반쯤 식은 커피처럼 뜨뜻미지근한 마음에도 때때로 스며드는 존재들은 있습니다. 제겐 싱어송라이터 예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예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는 직접 작사와 작곡을 하는 26세의 젊은 여성 뮤지션입니다. 지난 5월 제15회 오월창작가요제에서 ‘거리를 행진하는 소리’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한 실력파이기도 하죠. 어쿠스틱 기타에 얹어지는 포근한 보이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눈처럼 소복이 쌓여가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안에서 얼음처럼 투명한 단단함을 만나기도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그가 쓰는 노랫말을 좋아합니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단 한 줄도 허투루 쓰지 않았을 게 틀림없는 가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어떤 때는 제게서 떨어져나간 한 조각을 찾은 것처럼 서글퍼지고, 어떤 때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시적인 예언을 접한 듯 충만해집니다. 올여름 그의 노래 ‘호흡’을 들으며 빈곤한 마음을 몇 번이나 가다듬었는지 모릅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입니다. 사드 반대 투쟁의 열기가 한풀 꺾인 2017년 경북 성주 소성리에서였죠. 당시 막 스무 살이 된 그는 그곳에 머무르며 <새 민중음악 선곡집-소성리의 노래들> 제작에 참여했습니다(<시사IN> 제519호 ‘스무 살 싱어송라이터가 민중가요 만든 이유’ 기사 참조). 그 앨범에 실린 곡 ‘나가주오’에서 예람은 이미 자신만의 스타일과 잠재력을 뚜렷하게 드러냈지요. 이후 서울 아현포차, 궁중족발 등 투쟁 현장에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간혹 유튜브에서 그의 노래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가녀림 속에 힘을 품은 목소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문뜩 떠오르곤 했거든요. 그러나 곧 실망하고 돌아서기를 반복했습니다.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매력으로 취향을 끌어당기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며 동어반복을 하는 인디 뮤지션 가운데 한 명을 보는 기분이었달까요.
몇 년간 관심을 끊고 지내던 중 우연히 2022년 발매된 예람의 2집 <세상의 끝에서>를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제가 원석으로 접했던 그 뮤지션이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황홀하고 다채로운 빛깔을 뽐내는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거든요. 보통은 배경음악처럼 다른 일을 하면서 노래를 틀어놓곤 했는데, 꼭꼭 씹어 맛을 음미하듯 앨범 전곡을 하나씩 들어보았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해보는 경험이었지요. 대체 어떤 경험이길래 이리 호들갑을 떠나 궁금하시다면 이 앨범의 ‘바다로 가요’ 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짙은 서늘함이 배어 있어 여름에 듣기 알맞은 곡이거든요.
얼마 전에는 예람의 단독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성의 주인’이라는 타이틀의 공연으로 1집 <성>의 수록곡들을 불렀어요. 이 앨범 타이틀은 동명의 곡인 ‘성’입니다. 그 곡에서 예람은 “한없이 작고/ 여린 성을 짓고 있어/ 그 성의 주인은/ 온전히 외로운 나”라고 노래했는데요, 이날 기타 한 대와 목소리만으로 객석을 꽉 채운 예람은 이제 자신이 쌓은 성의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아주는 여유로운 주인처럼 보였습니다. 단촐한 무대도, 예람의 검은색 민소매 원피스도, ‘바다 넘어’로 시작해 ‘성’으로 끝난 세트 리스트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주 적당한 공연이었습니다. 앙코르곡으로 예정에 없이 부르게 된 그 곡을 듣기 전까지는요.
“늘 진실한 꿈을 꾸게 하시고/ 믿음과 의심이 뒤섞이게 하옵소서”라는 가사의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찌릿 하고 오는 것 같았습니다. 곡의 중간쯤 가서는 녹음기처럼 노랫말을 머릿속에 저장하지 못하고 줄줄이 흘려보내고 있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죠. ‘기도’라는 제목의 이 곡은 아직 앨범으로 출시되지 않은 미발매곡으로, 공연에서도 거의 불러본 적이 없는지 이 노래를 하기 전 예람은 ‘가사를 틀릴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 한 곡에 더 깊어진 그의 세계를 엿보았다고 하면 너무 과한 수사가 되겠지만, 저에게는 예기치 못한 일격이었습니다. 만찬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하는 짜릿한 디저트처럼요.
호들갑스럽게 써두었지만 저는 예람의 모든 공연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결코 되지 못할 겁니다. 덕후들을 동경‘만’ 하는 사람으로 계속 남을 거라는 것도 이제는 압니다. 그게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언제 돌풍이 찾아오나 목 빼고 기다리기보다는, 마음을 스치는 미풍들을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대해보려 합니다.
이 글이 독자님의 마음을 살짝 흔들었다면 주말에 예람의 노래를 한 곡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노래 제목에 유튜브 링크를 모두 걸어두었습니다.)
그럼 다음 편지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하시길요!
✍🏼 김연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