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추석 연휴는 무척 길었습니다. 최장 열흘까지 쉴 수 있다고 하여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렸던 ‘황금연휴’, 님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나흘간 경남 통영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의 여행이었습니다.
통영이라는 장소의 첫인상은 뜻밖에도 ‘작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도권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지역 여러 곳을 가보았고 그때마다 서울에서 찾기 어려웠던 소박함과 여유를 느꼈지만, 통영이 주는 아늑함은 사뭇 다르더군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바다 덕분이었습니다. 탁 트인 바다를 끼고 있는 여타 다른 항구도시와 달리 ‘통영의 바다’는 보는 이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보살피는 듯했거든요.
그래서일까요? 이 자그마한 고장, 통영은 바다가 낳고 키운 예술가가 많은 ‘예향의 도시’입니다. 통영과의 인연을 자양분 삼아 소설·시·회화·공예·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 가운데, 작곡가 윤이상이 있습니다.
윤이상은 1917년 9월17일 통영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나를 데리고 밤에 고기를 낚으러 바다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조용히 배 한가운데 앉아서 고기가 뛰는 소리와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윤이상은 늘 자신의 음악이 고향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습니다.
창작 인생의 황금기를 독일 베를린에서 보낸 윤이상은 독일 정부로부터 예술적 공헌을 인정받아 대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1967년 중앙정보부가 당시 서유럽에 거주하던 대한민국 교민과 유학생 가운데 194명이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들어가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한 후 이들을 납치한 사건.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노, 시인 천상병 등이 간첩으로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에 연루된 그에게 고향은 ‘종북 인사’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은 대한민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한 채 1995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의 유해는 생전의 염원에 따라 고향 통영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경남 통영시 통영국제음악당 건물 뒤편,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작곡가 윤이상의 묘가 있다. ⓒ시사IN 윤원선
작곡가 윤이상의 묘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시사IN 윤원선
“나는 일생 동안 목숨을 걸고 가능한 한의 일을 할 것이고, 그리고 어느 날 일을 끝내고 다시 한국의 고향에 돌아가, 그저 조용히 해변에 앉아서 낚시를 하고 싶습니다.” 음악이라는 무기로, 민족이라는 믿음으로 평생을 투쟁하듯 살았던 작곡가 윤이상에게 통영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시대와 작품을 따로 떨어트려 생각하는 법을 몰랐던 그에게 조국은 어떤 곳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