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문화팀 이상원입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네요. 저희 가족은 단체로 감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돌이켜보면 올해는 참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상반기는 내란과 탄핵 여파로 날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고, 하반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목을 집중시켰지요. 찰리 커크 사망과 미국 극우를 취재하면서 미국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간 건 25년 전 일입니다. 초등학생의 눈에 미국 사회는 참 매력적이더군요. 늘 먼저 인사를 건네고 ‘스몰 토크’를 시도하는 모습이 낯설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신기하고 재밌는 물건들, 말끔하면서도 자유로운 차림새에도 눈이 돌아갔습니다. 당시엔 생각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넘쳐흐르는 부(富)에서 오는 여유를 선망했던 것 같습니다.
9년 전 출장 때는 미국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버몬트주 벌링턴에 대체에너지 취재를 하러 갔을 때입니다. 벌링턴은 전력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합니다. 사실 저는 에너지 정책 자체보다는 의사결정 과정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벌링턴은 주민 대표들로 이루어진 ‘커미션’이라는 독립적 대의 기구를 두고 숙의 과정을 통해 정책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의제를 설정하고 설문조사를 시행하며, 그 결과를 토대로 시청이나 시의회에 건의한다고 합니다. 에너지 외에도 교통·소방 등 각 분야마다 이런 대의 기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커미션 의장의 이런 설명을 들은 뒤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의 기구가 너무 많다. 시장·시의회·각 커미션 입장이 상충하면 의사결정 효율성이 떨어지지는 않는가?” 의장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라는 표정으로 제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더니, 말을 천천히 골랐습니다. “커미션은 시민을 대표해 권력을 견제한다. 이 방식은 분명 더 복잡하지만 일을 바르게 굴러가게 만든다. 그게 민주주의다.”
답변을 듣고 반발심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왔다고 무시하는 건가? 나도 삼권분립 배웠고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해, 이 양반아.’ 무슨 말을 덧붙일까 싶다가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내가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은 사회에 적응한 건 아닐까? 혹시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게 자격지심인지, 몰이해인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오래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벌링턴은 1980년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시장을 지낸, 미국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입니다. 짧은 출장 경험으로는 이곳이 미국 민주주의의 대표 주자가 아니라 ‘튀는 사례’라는 점을 파악하긴 어려웠습니다. 이후 미국에선 제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 계속 일어나더군요. 트럼프 대통령 당선, 언론과 여론 양극화, ‘가짜뉴스’ 레이블링, 트럼프의 재선, 일론 머스크의 부상, 관세 전쟁까지···.
논란거리야 수없이 많으나, 그 무엇보다 위험하고 의외인 시그널은 표현의 자유 축소 같습니다. 찰리 커크를 비판한 자국 내 언론인을 쫓아내거나 그의 사망에 논평한 외국인들의 입국을 금지한다는 미국 내 보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0년 전 제가 상상하던 다른 차원의 민주주의는 미국 정치에서 점점 저무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달리 미국은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가 아니지요. 비슷한 비용을 들여 더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기회가 되면 미국에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전성기 미국’의 편린이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전에 쓴 기사 탓에 공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하는 불상사가 없어야겠습니다만···.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 이상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