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사IN> 경제국제팀 이종태 기자입니다. 모두 건강하시겠지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듯한데, 저는 1990년대 중후반에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 거의 줄곧 경제 기사만 써왔습니다. 그쪽을 전공한 까닭인지 편집국장들이 다른 부서엔 도통 보내주지를 않아요.
가끔 지인들이 제가 오랫동안 경제 기사만 썼다니까 ‘앞으로 오를 주식 종목을 찍어달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찍어줍니다. 다만, 그러고 나면 다시는 부탁하지 않지요. 사실 저는 경제 상황의 큰 흐름을 기반으로 유망 종목을 추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정보는 지인들도 알거든요. 주식시장이 앞으로 어떻게 변동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경제 쪽 기자는 물론 인공지능에게도 불가능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머리를 굴려 선택하든, 원숭이(고양이도 괜찮아요) 한 마리를 컴퓨터 앞에 앉혀놓고 임의로 고르게 하든, 그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비슷할 겁니다. ‘내부 정보’를 이용하는 범죄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의 움직임을 취재하는 기자로서 제가 죄책감을 느끼는 부문은 따로 있습니다. 중소기업 관련 기사를 거의 쓰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실 정부 정책이나 대기업 관련 정보는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꽤 많지만 비상장 중소기업은 그렇지 않아서, ‘취재 자체가 힘들어’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기사엔 ‘사업체 법인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전체 노동자 가운데 거의 90% 정도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해온 당사자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뿐 아니라 정치와 국가정책, 금융, 언론 등의 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존재감은 매우 흐릿합니다. 최근 노란봉투법의 법제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노조법 제2조 개정안에 따르면, ‘사용자’ 개념을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등 근로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하는 자(=원청 대기업)’로 확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한 중소기업을 건너뛰어 원청 경영진과 직접 교섭할 수 있게 된 셈이죠.
문제는 중소기업 경영진이 노사관계의 당사자이면서도 당사자가 아닌 처지로 내몰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청이 노사 교섭에서 사용자 측 주도권을 행사하면, 하청 경영진은 여기서 나온 합의만 집행하면 되거든요. 원청을 편들면 ‘노조 탄압 하수인’, 자사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면 ‘갑(원청)으로부터의 보복’을 당하는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원청과 하청 노동자 간 교섭이 타결되면 다행이죠. 여의치 않은 경우, 원청은 자사에 단체교섭을 걸어오는 하청 노동자 소속 회사와 거래를 단절하거나 납품 물량을 줄여버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노란봉투법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 구조에서 중소기업 경영진의 처지는 좀처럼 공론화되지 않습니다. 논란의 대결 구도는 ‘대기업 대 중소기업 노동자’로 짜입니다. 중소기업 경영진은 ‘싸움’의 한 당사자도 되지 못하는 거지요. 그들의 입장은 간혹 언론을 타더라도 ‘피해 우려’나 ‘시행 유예’를 호소하는 데 그칩니다. 산업 질서가 재편되는 이 중대한 시기, 중소기업 경영진의 이미지는 단지 ‘피해자’나 ‘약자’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최선일까요. 중소기업 측이 약자가 아니라 산업 질서의 설계자로 나서는 적극적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나요. 당초 노조법 제2조 개정안은 지금의 ‘기업별 교섭’ 구조와 상응하지 않습니다. 원청이 단가·물량 결정을 통해 하청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까지 좌지우지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죠. 이런 측면에서 제2조에 담긴 노동계의 요구엔 상당한 합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원하청 구조에서 제2조 개정안의 시행이 자칫 ‘을(하청)’이 ‘갑(원청)’에게 끌려다니다가 중소기업 부문의 역량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은 산업 공급망의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원청에 납품 단가와 법적 리스크의 상호 분담을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행 유예’가 아니라 ‘제도 개편’을 적극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중소기업 경영진이 원청과 ‘사용자 연합’을 구성해 원하청의 노동자들에게도 ‘대표 교섭 기구’를 요구하면 어떨까요. 이는 사실상의 산별 교섭을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 제2조 개정안은 산별 교섭이 작동해야 ‘산업 경쟁력 강화’ ‘노동시장의 형평성 제고’ 등 국가경제 차원에서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은 전경련·경총 등을 통해 국가정책에 개입합니다. 중소기업계도 당사자로서 당면한 산업 질서의 재편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 경제의 허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원청이 두려울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중소기업계도 단결해서 맞서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중소기업계가 스스로를 피보호자가 아니라 제도를 바꾸는 집단적·정치적 주체로 재정립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답답함을 느끼시는 중소기업계 독자가 이 뉴스레터를 읽으신다면 제 이메일로 연락 한번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더 늦기 전에 관련 기사를 많이 쓰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