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2026년이라니. 저는 새해가 되면 비로소 작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연말에 미리 하면 되지 않느냐고들 하지만, 12월31일 23시59분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2025년을 전부 살아보고 정리하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저는 매년 이맘때 ‘작년 중, 평생 기억에 남기고 싶은 한 순간’을 떠올려봅니다.
몇 년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본 후 생긴 습관입니다. 영화에는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림보’라는 공간이 나옵니다. 죽은 사람들은 이곳에 7일간 머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고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그 행복한 순간 속에 영원히 머물게 되죠. 영화를 본 직후, 내가 죽는다면 림보에서 어떤 기억을 고를까 적어봤습니다.
[메모 일부]
- 6학년 졸업식. 동전 복사 마술쇼 한다고 교실 앞으로 달려나갔지. 근데 뛰어가는 중에 외투 소매에 숨겨둔 동전을 다 떨어뜨려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든 순간. 몸이 굳었지만 마치 마술을 한 척 “짜잔~” 하니 6학년 친구들, 선생님 모두 웃으며 박수 쳐줬어. 사람들의 다정함.
- 대학교 1학년. 새벽의 노천극장. 언제 가도 설렜어. 귀뚜라미 소리. 얼굴을 감싸는 차가운 바람. 함께 나눈 대화들. 처음 찍은 영화의 공간.
- 엄마와 누나들과 시골 내려가면서 차에서 수다 떠는 순간. 맨날 같은 레퍼토리의 얘기를 하는데 항상 즐거워. 엄마가 행복해 보이는 순간.
죽어서 림보에 갔는데 가져갈 장면이 없다면 꽤 낭패일 겁니다. 그래서 매년 제 기억을 차곡차곡 쌓고 있습니다. 기록해 두면 사는 동안에도 더 선명하게 곱씹을 수 있어 좋습니다. 다행히 2025년은 림보에 가져가고 싶은 장면이 두 가지나 떠오릅니다.
첫 번째 장면은 엄마와 단둘이 간 제주도 여행입니다. 성산 바다가 통창 너머로 보이는 LP 바에서 함께 음악을 듣던 시간입니다. 평생 휴일 없이 음식 장사를 해오신 엄마는 쉬는 법을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 엄마에게 색다른 경험을 시켜드리고 싶어 모시고 간 곳이었죠. 턴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각자 헤드셋을 꼈습니다.
엄마에게 좋은 가사를 들려주고 싶어 신중하게 고른 곡은 카니발의 <벗>이었습니다. 헤드셋 너머로 음악이 흐르고, 엄마는 말없이 창밖 파도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옆모습을 보는데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평생 자식들을 키우느라 본인의 욕망은 아주 잊고 사셨을 엄마. 그런 엄마가 이 단순한 기쁨을 누리는 데 참 오래 걸렸구나 싶었습니다. ‘언제나 숨이 찰 때면 쉴 곳이 있어 좋구나’라는 가사처럼, 제게 쉴 곳이었던 엄마에게 이제는 제가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엄마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게 많은 줄 모르고 살았다”라며 아이처럼 좋아하셨습니다. 2025년의 가장 선명한 한 컷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