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시사IN> 편집소통팀 이상원 기자입니다. 부서를 옮긴 뒤 처음 인사드립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한때는 해가 바뀔 때마다 거창한 소망을 품었는데, 계엄 이후엔 ‘별일만 없기를’ 먼저 바라게 됩니다.
편집소통팀은 특별한 때 외에는 기사를 쓰지 않습니다. 동료 기자들의 원고를 읽고 사실관계와 표현을 점검하는 게 주된 업무입니다. 마감날에는 자정을 넘길 때가 많습니다. 기사가 늦게 들어오면 제작부서도 녹초가 됩니다. 사실 야간 노동을 초래한 ‘역적’이 될 때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10년 만에 입장이 바뀌니 기분이 묘합니다.
부서 이동은 ‘오더’였지만 제 민원이기도 했습니다. 직접적 이유는 예측 불가능하고 들쭉날쭉한 취재 업무에 비해 비교적 규칙적으로(?) 고된 업무를 택해, 세 돌 된 딸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입니다. 최근 궁금한 게 많아진 아이는 “왜?”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삽니다. 아빠의 거취도 의문의 화살을 벗어날 수 없었나 봅니다. “아빠는 왜 아침에 잠만 자?” “아빠는 왜 집에 안 들어와?” “아빠는 왜 맨날 맨날 회사만 가?”라는 질문을 시도 때도 없이 던집니다. 마감날 편집 노동은 고되지만, 그 외의 저녁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편집소통팀 발령이 일단 아직까진 반갑습니다.
취재 부서를 떠나고 새삼 깨닫게 된 바가 있습니다. ‘멀티태스킹’에 능하지 못한지라, 몸은 회사를 떠나도 마음은 대부분 기사에 쏠려 있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12·3 계엄 이후 세상이 여러 차례 뒤집히는 동안에는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할 문제가 있으면 아이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생각보다 어른의 심리에 둔감하고 인내심이 강해서,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는 부모에게도 끊임없이 말을 겁니다. 그럴 때, 미디어를 보여주게 됩니다.
몇 주 전 오랜만에 대형마트에 갔다가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돌이 좀 넘어 보이는 아이가 유모차에 누워 있었는데, 손잡이에는 휴대전화가 연결되어 있더군요.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했습니다. 장을 보는 짧은 시간에 그런 이상한 유모차를 세 번 봤습니다. 제법 큰 어린이들이 휴대전화를 보는 모습은 슬슬 익숙해질 정도인데,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 아기가 그렇게 하는 건 무척 놀라웠습니다.
사실 육아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아이 부모를 곁눈질하며 혀를 끌끌 찼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급한 연락을 받거나 업무를 처리할 때, 아니면 그냥, 휴식이 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때가 많습니다. 미디어는 아이를 즉각 얌전해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수단이라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남의 아이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을 때면 제 모습을 거울로 보는 듯해, 멈칫하게 됩니다.
괜찮을까요.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은 몇 년간 우리는 팬데믹이 파괴할 관계를 염려했습니다. ‘비대면에 익숙해진 세대가 공동체에 적응할 수 있을까’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가 급변하지 않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상만큼 오래 지속되지 않았음에도 ‘비대면 일상’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가 여럿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세대 전반이 젖먹이 시절부터 접하는 스마트 기기는 어떨지 상상하게 됩니다. 30년이 지난 뒤 아이들이 주도할 사회적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언가 변했다면, 그 사실을 우리가 인지할 수는 있을까요?
붙잡고 있는 사건이 한 시대의 변곡점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고된 노동의 이유를 찾다가 그렇게 ‘믿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기사를 보며 ‘사실 이건 생각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구나’란 생각이 들고, 얼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5년, 10년 전 예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를 놓쳤을 때입니다. 돌아보기에 다소 이르지만, 지난해 아동·청소년의 스마트 기기 기사를 좀 더 길게, 깊이 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극약처방’에 나선 해외 사례를 취재해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는 편집과 소통 업무에 진력하겠습니다. 퇴근 후에는 식구들에게 진 빚을 갚으며 재충전도 해오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