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님 안녕하세요. 한낮 기온이 섭씨 10℃를 넘어가는 걸 보니, 슬슬 봄기운이 찾아오려나 봅니다. 독자님의 겨울은 어땠나요? 사회팀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윤석열의 내란우두머리 혐의 1심 재판 선고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2024년 12월 겨울을 오롯이 내란의 후유증으로 보냈고, 이후 1년간 내란 수괴 윤석열의 궤변 가득한 변명만 듣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찝찝한) 무기징역 선고 후 잠시 숨을 돌리니, 이제 눈앞에 다가온 우리 사회의 숙제들이 눈에 보이네요. 그중에는 정치권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지역 통합 문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광역시 키드’입니다. 광주광역시에서 초등·중학교를 졸업했고, 어렴풋하게 세기말 광역시의 풍경을 유년의 기억에 각인해두고 있죠. 1990년대 처음 아파트 분양이라는 걸 받았던 부모님을 따라 당시 광주시 북구 용봉동에 위치한 중흥아파트에 입주한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우미·대주·호반·금호·모아 따위의 이름이 붙은 ‘아파트 키드’들이 많았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저는 저런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전국에 다 깔려 있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우연히도 1990년대 호남 지역 건설사들이 광주 외곽 지역에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고, 이들이 훗날 혁신도시나 지방 신도시, 경기 지역 신도시의 주택공급 정책의 수혜를 입었다는 것을요(‘벌떼 입찰’ 같은 꼼수까지 등장했고요). 지금은 대우건설을 인수한 중흥건설도 당시엔 지역에 막 자리 잡은 신생 건설사에 불과했습니다. 용봉동은 훗날 전국구 시공사가 되는 이들의 인큐베이팅 공간이었고, 제가 살던 중흥아파트도 이 건설사의 열두 번째 아파트에 불과했습니다.
갑자기 웬 아파트 얘기냐 싶으실 텐데요. 마침 조귀동 작가의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지방 산업이 부재한 상황에서 아파트 같은 건설·토목 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호남 지역 산업 생태계를 꼬집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 소위 ‘시공능력평가 20위권 건설사’는 등장했지만, 아파트만 가득한 도시로 남은 광역시의 부실한 성장이 오버랩됩니다. 이는 광주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대구 역시 대규모 아파트 공급에 의존한 지역 경제가 과잉 공급에 따른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이어졌고, 부산도 ‘YK스틸’ 이전으로 대표되는 아파트 경제의 후폭풍이 전국적으로 회자되고 있죠.
도시에 크레인은 높이 치솟지만, 막상 젊은 인구는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고령화가 지속되는 현실. 오늘날 광역시가 처한 대표적인 풍경입니다. 20세기 말 광역시는 지역의 중심도시로서 각 지역 외곽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성장했습니다. 이촌향도는 사실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향성이 수도권으로 바뀌었고, 인구댐 구실을 하던 지방 광역시들은 부실한 산업 생태계 때문에 허물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지역 통합일 것입니다. 중앙정부의 유인책도 있습니다. 연간 5조원씩 4년간 최대 20조원 수준의 재정을 지원한다고 약속했습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전-충남, 광주-전남, 대구-경북 지역의 행정 통합 움직임이 빠르게 일었고, 지역마다 ‘지금이 통합의 호기’라며 속도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역 거버넌스의 핵심인 ‘숙의’나 ‘공론화’는 제쳐두고 정치인들의 상향식 통합이 거북한 것이 사실입니다. 중앙정부의 재정지원 규모를 모르는 분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죠. 저 역시 이런 속도전은 지역사회의 체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통합은 행정 혁신 자원 확보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주와 전남이 통합하면 각각 별도로 교부되던 예산을 한꺼번에 집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지역 내에서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고, 집중투자 시 활용 가능한 지방재정의 사이즈가 커집니다. 솔깃합니다. 전략적으로 살릴 곳을 살리는, 앵커 산업을 육성하는 지방정부의 선택권이 조금이나마 늘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게 통합한 지방정부가 얼마나 현명하게 미래 전략을 세울 것인지는 별개 사안입니다. 어쨌든 ‘선택지를 하나라도 늘린다’는 게 이번 통합 시도의 핵심일 겁니다.
통합한다고 자연스럽게 인구 감소가 멈추는 건 아닙니다. 지금 통합을 추진하는 이들은 ‘적어도 선택지는 만들자. 활용 가능한 재정 카드는 확보하자’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는 설령 그러하더라도 ‘해당 선택지를 확보하는 과정이 이렇게 속도전일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지역 내에서는 다른 생각을 갖는 분들이 많고, 이들의 절박함을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 자리 잡은 제가 함부로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지방정부의 행정적 역량만으로 늘어난 재정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구심이 듭니다. 더욱이 이렇게 확보한 재정을 지역 내부에서 또다시 ‘적당히 나누고 분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통합의 효과도 떨어지겠죠. 통합을 속도전으로 밀어붙인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통합 이후의 마스터플랜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찝찝한 마음을 키우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중에는 저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고향의 변화를 지켜보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특히 현재 수도권에 거주하는, ‘상경 경험이 있는’ 분들은 더더욱요. 한편으로는 고향에 기여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향에서 통합을 소리 높여 추진하는 이들에 대한 묘한 불신도 섞여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사안이 더더욱 ‘과정에 대한 숙의’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통합이 만들어낼 미래에 대한 토론이 부재한 탓에 이 정책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떤 사안은 시간을 두고 논의할수록 각자의 이해관계가 점점 선명해져 훗날 답을 내기 더 어려울 수 있다고요. 가끔은 일을 먼저 저지르고 미래를 논의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행정 통합의 공론화 과정이 지속될수록, 소지역주의가 발현되어 될 일도 못 되게 만들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면한 고향의 변화는 두근거리는 마음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더 크게 일렁입니다. 부디 저의 이런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