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딱 오늘, 윤석열이 탄핵됐습니다. 느닷없는 비상계엄이었지만 시민들이 발 빠르게 국회로 달려가 해제됐죠. 하지만 서부지법 테러와 ‘지귀연-심우정 합작품’인 윤석열 석방 등을 겪으면서 작년에는 봄을 즐길 여력이 없었습니다.
잡히지 않는 탄핵 선고기일을 기다리며 뭘 먹어도 얹힌 기분이었습니다. 소화불량에 시달렸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다행히 올봄의 벚꽃과 개나리는 유난히 화사해 보이네요. 그만큼 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겠죠. 안녕하세요, <시사IN> 김은지 기자입니다. 독자님은 2026년의 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저는 지난 3월30일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하는 ‘2026 세계기자대회’에 참석해 12·3 계엄 당시 한국 언론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그 덕분에 전 세계 30개국에서 온 기자 41명 앞에 서서 지난 1년여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PPT를 준비하며, 2024년 12월3일 밤 <시사IN> 라이브 방송과 1주년 다큐멘터리를 다시 봤고, 윤석열 1심 판결문도 정독했습니다.
그날의 이야기는 몇 번을 곱씹어도 지겹지가 않더군요. 오히려 놓쳤던 감정과 사실을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를 가장 울컥하게 했던 것은 윤석열 1심 판결문에 인용된 이 부분이었습니다.
“12월4일 새벽 0시47분, 제1공수특전여단 작전참모(A)는 1대대장(B)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받았다.
A: 어. 그래. 뭐 보고인 상황이니?
B: 예. 선배님, 지금 저희 앞에 (국회) 본청 입구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아, 기자들이 지금 너무 완강히 대응하고 있습니다.”
계엄의 밤, 국회에서 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하던 기자들 또한 시민과 함께 저항했다는 사실이 판결문이라는 역사적 기록에 남았습니다. 그날 계엄군을 취재하던 어느 기자는 포박을 당할 뻔했고, 윤석열에게 비판적이었던 특정 언론사에는 단전·단수 조치가 취해질 뻔했다는 사실도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언론은 단순한 상황 중계나 기계적 중립에 그치지 않고 ‘헌법 수호’라는 목적 아래 보도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80년 광주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저는 외국 기자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물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우리는 빚진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시절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당시의 부끄러움과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고 배우며 이야기하고 자랐습니다. 1980년 신군부의 검열 앞에 무력했던 기자들의 깊은 반성이 2024년 발 빠르게 움직이게 해줬다고 믿습니다.
밝은 면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빠르게 제압했지만 극우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점도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한국 역사상 법원이 처음으로 공격당한 서부지법 테러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 탄핵 선고 직전까지 활발했던 극우 에너지가 지금은 상대적으로 잠잠해 보이지만, 여전히 극우의 유증기가 사회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완료형이 아니라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역할의 중추에 언론이 있다는 것도 말씀드렸고요.
외국 기자들에게서 가장 많은 피드백이 나온 부분은 이것이었습니다. Z세대의 뉴스 소비였습니다. 독자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감은 국적 불문이더군요. 저는 비상계엄 당시 젊은 세대에게 뉴스가 효능감을 발휘한 예로 계엄군 사례를 들었습니다. 비상계엄 때 국회로 빠르게 뛰어간 시민들이 젊은 계엄군 병사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언론이 끊임없이 그 상황을 보도했다는 점도 언급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소극적 대응이 비상계엄을 막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탄핵 결정문에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이라는 문구가 담겼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켰던 그날의 이야기는 세대 불문하고 진짜 뉴스는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이 더 애틋합니다. 탄핵 선고 1년을 맞이해, 우리 서로 정말 수고했다고 다시금 인사를 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