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사IN> 경제국제팀에서 기사 쓰고 있는 이종태입니다. 솔직히 이 ‘뉴스레터’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고민이 많습니다. 어떤 주제로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해당 시기에 저에게 충격을 주었거나 심금을 울린 사건을 소재 삼아 뭔가 긁적거리는 식으로 이어왔지요. 이번에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저와 아래위로 10년쯤 차이 나는 40대 중후반에서 60대 사이 독자들을 주된 “타깃(‘우리’로 칭할게요)”으로 한 글이라는 점만 밝혀둡니다.
6월3일 지방선거 결과를 보며 저는 20~30대 젊은이들의 선택에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SNS에도 저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자식’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며 넋두리한 게시물이 꽤 많더군요. 저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 관련 전공을 했다는 이유로 줄곧 경제팀에서만 일해와서 이런 현상을 정치론이나 세대론으로 분석할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뉴스레터’인 만큼 제가 느낀 소감을 간략하게 털어놓을까 합니다.
일단 ‘우리’가 ‘혈연’과 가치관의 차이를 느낀 것이 첫 경험이 아니란 점부터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20~30년 전으로 돌아가봅시다. 저만 해도 아버지나 어머니, 동네 어른, 교사들의 정치적 견해를 귓가에 스쳐가는 바람 소리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그분들이 옳았고 당시의 제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 많이 틀렸어요. 그리고 그 ‘어른’들 역시 자신의 청년 시절엔 윗세대에게 비슷한 태도를 가졌을 겁니다. 그분들이 청년 시대에 읽었을 여러 문헌만 봐도 어렵지 않게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윗세대에 대한 당시의 제 생각과 감정이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좀 원초적이고 초역사적인 부분입니다. 기존 세력, 기득권 혹은 ‘꼰대’에 대한 반항이죠. 요즘엔 ‘어그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더군요. 다른 하나는 당대의 시대적 문제들인 군부독재와 노동착취, 인권 탄압 등에 대한 ‘어른’들의 순응에 느꼈던 비판 의식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제 생각엔 옳은 점도 있지만 오류도 많았어요. 당시는 시민들의 정치, 경제적 기본권이 잔인하게 짓밟히는 야만의 시대였으나, 급속한 자본축적과 민주적 의식의 발전으로 오늘날 한국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래도 박정희 때 경제가 많이 발전했잖아요. 미국이 큰 도움을 줬잖아요’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이른바 ‘진보적’ 시각에서 시원한 답변을 해줄 수 있습니까? 반면 저는 제가 어릴 적 1980년대의 ‘어른’들이 자신과 상반되는 가치관을 들이대는 ‘우리’를 그나마 ‘귀엽게’ 봐주고 넥타이 부대로 나서고 이후의 변화에 적응해줬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성립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을 ‘우리’가 ‘어른’이 되어버린 최근의 상황에 적용해볼 수는 없을까요? 저는 20~30대를 만나 인터뷰하거나 이런저런 관련 문헌을 읽으며 그들을 이해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해봤습니다. 조금은 그들을 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문제의식을 좀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예컨대 그들을 꼭 알아야 합니까? ‘우리의 어른’들은 우리를 이해했을까요? 제 나름의 결론은 ‘이해’하려는 시도를 일단 던져버리고, 즉 판단을 중지하고, 초점을 바꾸는 겁니다. ‘이해’란 것엔 ‘지배욕’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다만 최근의 상황을 통해 비교적 확신하게 된 점이 있습니다. 민주화의 경험을 공유한 ‘우리’가, 상당수 청년들에겐 기득권자이며 지배 세력으로 보이게 되었다는 거죠. 젊은이들은 지배 세력에 반항하기 마련이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는 어느 정도 초역사적인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수십 년 전의 ‘우리’도 그랬잖아요.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절대 감화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 역시 ‘민주화를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는데’ 같은 설교엔 어떤 효능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단 뭔가를 비판하게 되면 그 대상의 긍정적 측면까지 모조리 ‘부정’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던가요?
이 같은 어느 정도 초역사적인 배경에, 요즘 청년들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적 모순들이 겹치면서 그들의 불만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파이가 팽창하던 고성장기’에 정치적·시민적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물론 당대에 우리가 싸운 현실은 그야말로 참혹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딱히 알아주지 않는데도 이름 없이 당대의 헌신을 기꺼워하는 이들이 여럿입니다.
그러나 과거 제 세대의 싸움이 사치스러워 보일 만큼 요즘 청년들의 삶이 팍팍해져버린 건 아닐까요? 성장률이 떨어져 그만큼의 기회가 줄어드는 가운데 청년 중 상당수는 자산도 없이 불안정한 노동환경과 싸우며 생존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시장, 연공급 중심의 보수 체계, 연금이나 교육제도 등 청년들의 이익이 걸린 영역들에서 후대를 위한 변화를 이뤄내지 못했거나 심지어 기피한 측면까지 있습니다.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위해 일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투쟁했다는 조직들에게 자신의 이익을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은 ‘우리’를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청년들 중 일부는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원리와도 정면충돌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언행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년 일반에 대해 ‘교정한다’거나 ‘투표 수로 밟아버린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윗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기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아요. 젊은 세대가 더 잘났거나 반드시 윤리적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윗세대가 자신의 ‘옳음’으로 젊은이들을 압도하는 공동체의 운명은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윗세대가 자신에게 저항하는 당시의 청년들을 완강하게 쳐내지 않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살피며, 나아가 ‘패배’했던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저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청년들을 ‘이해’한다는 오만을 버리고, 뼈아픈 실질적 타협을 모색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성장이 멈춘 지금, 그 타협은 우리가 당연한 권리로 믿고 견고하게 틀어쥔 기득권의 일부를 허물고 내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민주화와 노동권 수호, ‘자본의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의 이름으로 우리가 쌓아 올린 ‘연공서열’과 ‘연금’ 같은 튼튼한 방패가, 어느새 성벽 밖의 파편화된 노동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물질적 양보를 동반하지 않는 타협은 기만일 뿐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어그로’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부모들에게 ‘어그로’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