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 정치이슈팀 권은혜 기자입니다. 휴가는 다녀오셨을까요? 저는 강릉 바다에 발가락을 담그고 왔습니다.
휴가 기간 네 권의 책을 완독했습니다. 그중 두 권은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 <화염>, 비비언 고닉의 문학비평 <연애시대의 종말>입니다.
희곡은 제가 전혀 모르는 분야입니다. 희곡을 쓰는 친구에게 무작정 추천받아 읽었는데, 너무나 아름답고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의식적으로 소리 내어 글을 읽었는데요. 노래하는 것처럼 대사가 읊어지더군요. 희곡은 1970~1990년대 레바논 내전이 한 가족에게 미친 영향을 다룹니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꼭 한번 사서 읽어보세요. 195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입니다.
비비언 고닉은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꼽히는 작가입니다. 그의 책은 제가 ‘기자가 추천하는 책’을 통해 소개해드린 적도 있습니다. 사실 비평의 경우, 원작을 직접 읽지 않고 남이 비평한 글만 봐서 재밌기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역시 믿고 보는 비비언 고닉. 미국 문학을 자기 나름대로 칼질하고 요리해내는 솜씨에 또 반했습니다. 그가 비평한 소설을 찾아 읽고 싶어질 정도였어요. 이번 책의 제목처럼, 더 이상 왜 ‘연애’와 ‘사랑’이 문학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매개체일 수밖에 없는지 진단하는 부분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사실 이번 뉴스레터를 통해 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혹시 시 읽는 것을 좋아하세요? 입사 직후 한 선배가, “좋은 단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시집을 읽어라” 조언한 뒤부터 시간이 될 때 아침저녁으로 시 한 편씩 읽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물론 아직 1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터라 문장력이 크게 늘어난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좋은 시를 많이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기자가 추천하는 책으로 시집 한 권을 추천하기도 했지요. 알쏭달쏭한 텍스트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문장을 길어 올릴 때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고 감흥이 없는 시는 포기합니다. ^_^...
그리하여, 재미있게 읽은 시집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최근 문단의 아이돌로 떠오른 고선경 시인의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추천합니다. 솔직히,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는 시집이라 홍대병이 있는 저는 선뜻 빠져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읽는 순간 왜 모두가 좋아하는지 납득하고야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시집이 세 권 나왔는데, 저는 이 시집이 가장 좋더라고요. 웃기고 발랄하지만 가볍지 않은, 하지만 가벼워지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안간힘이 참 좋았습니다. 여름에 읽기 딱 좋은 시집이니 한번 맛보시길 추천해봅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해본다면요.
신년 운세 / 고선경
나는 남을 돕는 팔자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한 사주쟁이가 한둘이 아니다
잘 봐
내가 얼마나 쉽게 슬퍼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
나를 슬프게 만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야
슬플수록 사나운 표정을 짓게 되는 내가 있고
사나운 표정을 해명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행운의 색깔은 하늘색
오늘 내가 가진 물건 중 하늘색은 하나도 없네
누군가는 모든 게 나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그랬다 또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도 꼭 이루어질 테니 기쁨이라고
제일 친한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흔 살 되면 다 해결될 건데 뭐가 문제?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이지
팔자가 싫을 때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고 적었다
월급도 못 주는 회사를 관뒀을 때 가스가 끊겼을 때 이십육 인치 캐리어 질질 끌고 남의 집 전전했을 때
보세요 부의 기운을 담은 부적입니다 영민함을 상징하는 토끼 두마리가 그려져 있지요 아 그건 한정판 순금 부적이에요
승천하는 청룡과 여의주가 길한 기운을 가져다줍니다
단돈 칠만 원
없어 인마
내가 태어난 게 대길인 줄이나 알아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나에게는 아직 끝낼 인생이 남아 있다”라는 문장도 너무나 좋은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이 시가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한 명을 더 소개하고 싶어요. 제가 오래도록 좋아해온 시인 안희연입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시집을 꼭 사서 읽어보세요. 그중 제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말씀드려본다면요.
소동 / 안희연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왔다
슬픔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려고
어제는 우산을 가방에 숨긴 채 비를 맞았지
빗속에서도 뭉개지거나 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퉁퉁 부은 발이 장화 밖으로 흘러넘쳐도
내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비밀을 들키기 위해 버스에 노트를 두고 내린 날
초인종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정 넘어 벽에 못을 박던 날에도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지워진 사람
누군가 썩은 씨앗을 심은 것이 틀림없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기침을 할 때마다 흰 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 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긴 정적만이 다정하다
다 그만둬 버릴까? 중얼거리자
젖은 개가 눈앞에서 몸을 턴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저 개는 살아 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 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즐긴다
“아름다워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구절을 사랑합니다. 나중에 묘비명으로 쓰고 싶다고까지 생각할 정도랍니다!
쓰다 보니 욕심이 나서 뉴스레터가 길어졌습니다. 독자님이 좋아하는 시집도 추천해주시면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시사IN>도 재밌게 읽어주세요.